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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물 Oct 27. 2019

만남에는 능숙하고 연애에는 서툴러서

너무 많이 좋아해버릴까 마지막 한 마디는 또 참아버린다.


지레 겁먹거나 들통나기 싫어서 얼른 도망가 버리는 건 주욱 내 전문이었다.

실력과 실체가 들통날까 봐 최선을 보이지 않고, 상처받을까 덜컥 겁이 나면 우당탕탕 숨을 곳을 찾았다.

훤하게 웃고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앉아있으면서도 네가 조금만 틈을 보이고 눈길을 안 주면 금방 날아가 버리는 까다로운 짐승이라고 하필이면, 내가.


올해 유독 관계를 많이 겪으며 어떤 교훈을 누군가에게서 속속들이 뽑아냈다.

A를 만나면서 인생의 덧없음과 관대한 마음을, B를 만나면서 어리숙함의 매력을, C에게서는 정직하고 맑은 사랑을 D에게 부질없고 허탈한 뒤섞임에 대해 배웠다. 이제는 언제 X나 Y까지 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굵고 짧은 만남을 버무려왔다.

그러는 동안 상처가 아무는 시간이 줄고 몸의 씀씀이가 관대해졌을지언정 매력이나 애정 앞에서 도무지 사춘기를 벗어나질 못하고 달은 볼을 어쩔 줄 모르는 건 여전하다.


어떨 때는 항상 상대의 눈이 나로 가득 차있기를, 늘 같은 마음으로 사랑을 퍼부어주기를, 내가 질려 할 정도로 틈 없는 표현을 해주기를 혼자 하루 종일 앉아 바란다. 그가 일상 속에서 이따금 나를 떠올리고 미소를 지으며 가끔은 까먹는 동안 수도 없이 상대를 뜯어먹으며 혼자 발을 빼버릴 거라 으레 엄포를 놓는다. 남자는 차가워진 문체에, 외투를 걸치는 말투에 영문도 모른 채 당황한다. 아니 도대체 왜 그러는 건데.


그러게 나도 이런 꽁꽁 방어하는 내 자세가 물려. 근데 어떡해 잘 사랑하는 법을, 일상 속에 소중하고 특별한 한 사람을 녹이는 법을 잘 모르겠는데. 그래서 자꾸 내게 네게 상처를 주고 옮기고 될 인연도 죽 쑤는 게 내 특기이자 장기인데.

너무 많이 좋아해버릴까 마지막 한 마디는 또 참아버린다. 오늘만 해도 내 뇌리에 박힌 네 몸짓이나 표정이, 나를 녹인 언어가 지들끼리 프로듀스101을 찍고 있는데.


그러니까 내가 지나치게 치명적인 척을 해도, 너 아니어도 될 것처럼 쿨한 자세를 어설프게 취해도, 같이 있다 문득 낯선 표정을 지어도 조금만 이해해줄래. 나도 적응 안 되는 일상의 사랑을 네게 배워보려 하고 있거든. 가끔 무신경한 네 톡을,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 1을, 잠자리 후에 쉽게 뒤돌아 버리는 네 등을 소화해 보려고 꼭꼭 씹고 있거든. 나 성실하기보단 잔꾀를 부려 높은 점수를 받곤 하는 얌체 같은 부류에 속하곤 해서 잘 될지는 모르겠다.

또 몰라 네 앞에서는 유독 정직하게 노력해서 칭찬의 쓰다듬을 받아먹고 싶어 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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