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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물 Oct 30. 2019

이별 휴가를 쓰기에는 박한 세상이라

이 이별은 한번뿐인데 집중하면 안 될까요

익숙한 이름이 한동안 통화기록을 채웠다.
어제는 자주 떠오르던 번호가 감감무소식이었고 의외의 희미한 사람들에게서 낯선 전화가 더러 왔다. 기다리던 전화가 오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자꾸 신경을 썼으며 새로운 이름이나 번호가 뜨는 것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 여보세요, 어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죠?


나는 그들 앞에서 언제나 능숙하게 통화버튼을 누를 수 있는 상담사처럼 굴었다.
전화가 걸려올 때마다, 자고 있던 핸드폰 화면을 알림이 깨울 때마다 실눈을 뜨듯 두근대는 마음으로 그것을 보았다. 마음 쓰이는 사람과 간절한 연락이 있기 때문이었다.

왜 이럴 때 유독 개의치 않는 연락들이 오는지, 기다리는 한 사람에 비해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보잘것 없어지는지, 내가 그들에게 가진 본의 아닌 실망에 괜스레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근데 미안한 마음은 내가 그들에게가 아니라 그가 나에게 가져야 하는 것 아닌가.


밤 새 잠을 설치며 기다렸던 연락은, 드디어 떠오른 두어 개의 문자는 차가웠다. 미적지근만 해도 심술이 날 마당에 그의 연락은 정확한 띄어쓰기만큼이나 딱딱했다.
이별을 담은 카톡방은 생각보다 빨리 밑으로 밀려났다. 맨 위에 떠있던 그의 푸른 프로필 사진과 무미건조한 미리보기의 문자는 반나절만에 숭덩숭덩 털이 빠진 채로 아래로 아래로 잠겨갔다.

이상한 일이다. 관계가 끝나도 짧은 서사가 닫혀도 밤을 설쳐도 눈물을 흘려도 이불을 뻥뻥 차도 나는 밥을 먹고 주변인의 연락에 의연하게 답하고 편리한 카카오톡 고지서는 신명 나게 날아온다.


언제부턴가 우리가 사랑에, 이별에 집중하기에는 너무 정신없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내게 이어진 세상의 주삿바늘이 너무 많다고. 주렁주렁한 플라스틱 관들이 때로는 거추장스럽고 감당이 안된다고. 그것이 나와 그의 관계를, 따뜻함을 차가움을 세밀한 감정선을 손쉽게 넘겨버린다고.

금방 마르는 감정을 작은 지면에 옮기는 것이 빈약한 최선이다. 이따금 이런 글들이 그나 나의 감정에 대한 차가운 예의 같아서 내 안에서 발현된 문장들에 낯선 감정을 느낀다.


다시 밀린 연락에 답한다. 메일을 확인하고 글을 수정하고 고양이 화장실을 치우고 생계를 고민한다. 늘 지내던 일상에 웃을 일이나 설레는 마음이 좀 빠졌지만 그런 이유로 무턱대고 휴가를 쓸 수 있는 후한 세상에 살고 있지는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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