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꾸물 Nov 07. 2019

너를 만날 땐 깜박 두고 올 물건을 하나 챙긴다

괜히 한번 더 마주할 빌미

선물을 담은 용기까지 전하는 걸 좋아해
그 용기를 깨끗이 씻고
언젠가 나를 만나 건네야 할 테니까

그런 식으로 두고 주고 깜박한 척 한 물건이 많았다
너희 집에서 보낸 여러 밤동안
나는 그 너른 집에 몰래 옷을 한 두 겹씩 벗어 두고
벨트와 머리띠를 네 쿰쿰한 옷 사이에 숨겨두고
네가 뜸할 때면 옷과 벨트와 머리띠를 적어 보냈다
그러면 너는, 무심히 생각하고 그래 그럼 오늘 밤에 와
세탁해놨어 가지러 와

간 김에 옷은 보는 둥 마는 둥 너를 보고
네가 웃는 걸 보고 네 움직이는 몸을 보고 네 목소리와 리듬을 듣고
그러다 낮이 밝으면
우리가 다시 정신없이 뜬 해를 책임지러 가야 하면
또 하나를 두고 왔지
밤부터 준비한 하나.
언젠가 우리의 살결이 무심해질 테니
너무 중요하지 않은 하나
생각날 때마다 너무 시큼하지 않을 하나.

구석지에 몰래 작은 성을 만들다
어떤 날은 깜박 깔끔하게 나왔다

나 너네 집에 뭐 놓는 걸 깜박하고 나왔는데 좀 두러 가도 돼?

그럼 너는 웃으면서 오늘은 말고.
오늘이 아닌 날들까지 몇 밤을 그 집에서 지샜더라


나 아직도 이걸 자주 써먹는다
또 보고 싶은 얼굴 앞에

담백한 척 다시 들르고 싶은 곳에
뭔가를 자꾸 흘린다

어제는 누가 내 집에 립밤을 두고 갔어
그걸 볼모처럼 만지며 씩 웃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허무의 수미상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