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오전 11시가 넘었어도 매서운 초겨울 한파는 새벽 공기를 그대로 가지고 바람까지 불어 온몸을 에워싸며 입술까지 바짝 갈라지게 하였다. 민호는 테라스 동쪽 끝자리에 스며드는 햇살아래 자리 잡아 커피 한잔을 마셨다. 커피 한잔 마시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차가운 공기가 머릿속까지 얼게 만들었다. 얼어붙은 머릿속은 곧 마음까지 고요하게 만들었다.
"잘한다~. 이 춥은 날씨에 청승 떨고 있네."
익숙한 목소리와 냄새가 났다. 민호는 '설마?' 하며 일어서서 고개를 돌렸다.
"야~ 지동우! 네가 어떻게?"
"와? 내가 못 찾아올 것 같더나?"
".. 그게 아니고.."
"그렇게 불쌍하게 앉아있으면 좀 낫나?"
"그게 아니고, 여기가 제일 따뜻하다. 일단 들어가자."
민호는 동우를 뒤에서 안고는 밀면서 책방 안으로 들어갔다.
"뭐 좀 줄까? 뭐? 따뜻한 커피? 차? 아니면 시원한 생맥?"
"여전하네.. 라떼나 한 잔 주라."
"그래 좀 앉아라."
동우는 민호의 40년 친구다. 국민학교 입학과 동시에 매일을 몇십 년 동안 함께 한 놈이다. 동우에게서 나는 냄새가 민호는 좋았다. 어쩌면 그 냄새가 자기 냄새일 거라고 생각했다. 동우는 신간 매대부터 곳곳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훑어봤다. 민호는 햇살이 들어오는 자리에 라떼 한 잔을 놓고는 동우를 끌고 자리에 앉혔다.
"좀! 앉아라."
"....."
"어떻게 지냈어?"
"내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하는 일은 잘되고 있지?"
"내가 묻고 싶다. 밥은 먹고사나?"
"왜? 장사 잘된다."
"... 어이구.."
"지은이가 알려 줬어?"
"그게 중요해. 최소한 나한테는 말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말을 하려 했지. 좀 더 자리 잡고 잘되면...."
"우와! 그러면 평생 연락 안 하려고 했네."
"뭐라고.. 하하하.."
동우는 마시던 커피잔을 놓고는 뒷짐을 지고 책방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민호는 동우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녔다. 테라스로 나가서 한 바퀴 돌더니 햇살이 조금이나마 들어오는 끝자리에 서서는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는 주변을 돌아봤다.
"민호야!"
"왜?"
"나는 이곳이 마음에 안 든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왠지 네가 너무 편할 것 같다."
"내가 편하면 좋아야지. 왜?"
"나는 네가 편한 게 싫다. 일부로 이 구석진 자리 구해서 손님 안 오면 책이나 읽고 있는 네 모습 상상하니깐 싫다."
"뭐라고? 왜?"
"나는 그냥 네가 예전처럼 정신없이 일하고 바쁘게 살면서 시간 내서 나하고 가끔 소주나 한 잔 하고 그랬으면 좋겠다. 물론 지은이도 옆에 있고."
"....."
"내 갈란다. 책이나 30권 실어라."
"무슨? 30권이나?"
"왜? 없나?"
"아니, 있는데 다 어쩔라고?"
"직원들 줄 거야."
"그래.."
동우가 가고 얼마 안 지나고 문자가 왔다.
-친구야.. 책 재미있더라. 항상 응원한다. 나에게 너는 한강이야.-
민호는 순간 가슴 한가운데에 꾹꾹 쌓여 있던 말로 할 수 없던 무언가가 터져 나오면서 눈물도 같이 흘러내렸다.
별밤책방에서 바라본 겨울 밤거리는 어둡고 더 씁쓸하게 보였다. 양산천을 둘러싸고 있는 가로등 마저 지나가는 누구 하나 비추지 못하니 더욱 씁쓸하게 빛을 내는 것 같았다.
"봉우야. 우리 소주 한 잔 할까?"
"무슨 일 있..으세요. 표정.. 이 심각해 보여요."
"일은 무슨? 우리 따끈한 국물에 소주 한 잔 할까?"
"뭐 좀 준.. 비할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냥 간단하게 오뎅탕 하자."
"네... 기다리세요.. 그런데 다른 식구..들 안 불러도 돼요?"
"너무 늦었잖아. 그냥 우리 둘이 먹자."
주방에서 봉우의 부드러운 칼질 소리가 들리고 곧 오뎅탕 냄새가 별밤책방을 채우는 가운데, 민호의 머릿속에는 무언가가 끊임없이 맴돌았다.
"자자~ 오..뎅탕 나왔습니다."
"와~ 맛있겠다. 봉우야 잘 먹을게."
"네.. 형님 무슨 고민인지 모르지만 한 잔 받으세요."
"그래.. 너도 한잔 받아라."
민호와 봉우는 말없이 오뎅탕을 사이에 두고, 소주잔을 주고받았다. 뜨거운 오뎅국물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민호의 안경을 뿌옇게 만들어도 아무렇지 않게 소주잔을 내밀었다.
조용한 겨울밤은 두 사람 사이에 말보다 깊은 침묵을 흐르게 했다. 소주가 한 병이 비워질 때쯤 민호가 침묵을 깼다.
"봉우야. 오늘 오전에 내 40년 지기 친구가 왔다 갔는데.."
"네.. 우와~ 40년 지기 친구. 부럽네요.."
"그런데 그 친구가...."
민호는 봉우에게 오전에 동우가 다녀간 이야기를 말투까지 흉내 내면서 이야기했다.
"저는 형.. 님.. 이 부럽습니다. 친구..분도 멋지고요."
"부럽기는 내가 좀 한심스럽더라. 나는 왜?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지 못했을까?"
"....."
민호는 동우에게 받은 문자를 봉우에게 보여줬다.
"형님.. 저.. 한 테도 형님은 한.. 강 작가입니다."
"하하하. 그만해."
둘은 또 잔을 주고받으면서 침묵도 같이 왔다. 그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민호가 항상 묻는 질문으로 침묵을 깼다.
"봉우야~ 요즘 어떤 책 읽어?"
일주일에 한 번은 민호가 봉우에게 묻는 질문이다.
"저 어제.. 부.. 터 "여덟 단어" 읽어.. 요."
"박웅현 작가?"
"네."
"그래. 그래서 봉우는 어떤 단어가 마음에 다가왔어?"
"아.. 직 다 읽지 않..았는데요. 저는 '본질'이라는 단어요."모든 것은 변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와~ 봉우야 너 가끔 보면 천재 같아. 다 기억이나?"
"에이~ 어제 읽..었으니깐요. 그리고 이 글귀가 좋아서 외.. 웠어요. 형님도 생각나는 거 있죠? 말..해줘요?"
"있지. 나는 '인생'이라는 단어. "인생은 책이 아니다. 내가 채워나갈 공책이다.""
"우와~ 멋..진데요. 아직 인생..까지 안 읽었어요."
"그래.. 하하 한 살이라도 더 먹기 전에 공책에 좀 더 채워 넣어라. 하하"
"그러고 보니.. 벌써 올해가 다 갔네요.. 내일모레면 2026년..입니다."
"..."
"형님. 우..리 1월 1일 일.. 출 보러 갑시다. 다.. 같이 갈 수 있는... 사람 다 같이요."
"일출?"
"네."
"어디? 해운대? 광안리? 아니면 울산 간절곶?"
"아니.. 요. 거기는 멀기도 멀고 사람... 들 많아서 보기.. 도 힘들고 고생만 하죠?"
"그럼?"
"양산 사.. 람도 잘 모르는 양산에서 보는 곳이 있어요? 여기서 40분... 이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