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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다시 시작해요.

4-2

by 꾸니왕

"그래? 그럼 B&B 회장님이 진행해 보세요."

"넵!"

오뎅탕을 가운데로 두고 한쪽 테이블에 소주병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별밤책방 식구들의 따뜻한 온기 때문이었는지, 바쁘게 보내면서 나온 몸의 열기 때문이었는지, 잊고 지냈던 '외롭다.''그립다.'라는 감정이 소주 한 잔과 같이 민호의 가슴을 짜릿하게 만들었다. 며칠 전 왔던 갔던 지은이의 모습과 오늘 낮에 찾아온 동우의 말이 겹치면서 떠올랐다.

"봉우야."

"예.. 형님..."

봉우도 술이 알딸딸하게 취해서 발음이 꼬이기 시작했다.

"봉우야? 너는 사랑하고 싶지 않나?"

"네? 사랑요.... 사.. 랑"

"그래. 사랑."

"...."

"뭐야? 그 표정은 벌써 사랑하고 있는 표정인데?"

"무... 슨 소... 리 합.. 니까?"

"뭐지? 목소리가 떨리는데? 혹시 좋아하는 사람 있어? 겨울이 처럼 고백하고 싶은 사람. 아차! 이거는 비밀이다. 겨울이가 알면 나는 아마 레이저를 맞을 거야.. 하하"

",,,,,"

"왜 그래.. 진짜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그게... 아.. 닙니다.. 다.. 음에 이.. 야기할게요.. "

"그래 나한테 제일 먼저 소개해줘. 근데 봉우야. 나는 다시 사랑하고 싶다."

"네? 누구? 형.. 수.. 님요?"

"봉우야.. 나는 너무 나만 사랑했나 봐. 나를 너무 사랑해서 너무 이기적이었나 봐."

"아... 닙니다. 형님은 이... 기적이지 않다는 것을 다들 잘 알아.. 요."

"많이 그립다. 보고 싶다. 그때가 보고 싶다."

"그.. 때가 보고 싶다. 참 좋은 말인 것 같아요. 저도 보고 싶..어요..사랑..하게 될 때가 보고 싶어요."


제아는 민호가 권한 앤더슨 쿠퍼, 글로리아 밴더빌트의 '떠나는 자와 남는 자의 마지막 수업'책을 덮고는 한참을 자기 얼굴만 비취는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책 속에서는 어머니와 아들이 아주 늦었지만 너무 늦지는 않게 그들은 서로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문뜩 제아는 자신도 아주 늦었지만 너무 늦지 않게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제아는 당장이라도 '엄마에게 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몇십 분째 핸드폰만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은 가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서러움이 한 움큼 올라와 말 대신 눈물로 내뿜었다. 그렇게 말로 못하고 눈물로 대신한 제아는 한참을 울었다.

더 이상 서러움이 없어진 것인지, 울 수 있는 체력이 없는 건지 제아의 눈물은 멈췄다.

제아는 기분이 이상했다. 뭔가 내려놓은 듯한 해방감과 약간 허탈하면서도 맑아진 느낌이 들었다. 이 기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침대에 기대어 베개로 등을 받치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굳어 있던 온몸의 근육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마음속에는 여전히 복잡한 생각들이 엉켜 머물려 있지만 조금은 담담해지기 시작했다.

제아는 전화기를 들었다. 신호음이 울릴 때마다 심장 뛰는 소리가 신호음과 돌림노래를 했다.

"여보세요.. 엄마.."

"그래..."

"엄마... 나..."

"....."

"왜? 왜?....."

".... 미안하다.."

"...."

"...."

서로 말없이 전화기를 들고 있던 그 순간은 마치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제아의 눈에는 아직 남아 있는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렸다. 마음 갚은 곳에서 올라오는 감정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어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침묵으로만 흘러갔다. 전화기 너머 엄마의 숨소리와 떨림이 느껴졌지만 제아의 입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그렇게 둘은 한참을 말없이 전화기만 들고 있었다.

"제아야.. 엄마가 미안하다."

"....."

"새해에는 한 번 올래.. 너 좋아하는 떡국 해놓을게."

"... 끊어요.. 또 전화할게요."

서로는 40년 동안 그것이 사랑인 줄 알았다. 제아는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연우는 지난 10년 동안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여유로운 겨울 아침을 맞이했다.

두더지처럼 겨울만 되면 이불속을 파고들어 나올 생각을 안 하던 연우의 겨울 아침이 달라졌다.

민호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위해서는 돈보다 체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 말에 요즈음은 격하게 공감하고 있었다. 연우는 매일 아침 양산천 주변을 뛰었다. 벌써 두 달이 지났다. 체력도 체력이지만 뛰면서 머릿속에 복잡하게만 꼬여 있던 생각의 끈을 하나씩 풀어나가게 되었다.

한 시간 정도를 뛰고 돌아온 연우의 얼굴은 빨갛게 익어있었다. 거울로 비친 빨갛게 익은 얼굴마저도 좋았다.

아직 고요한 집안을 깨우기 싫어서 방 안에 앉아 어제 읽던 시어도어 젤딘의 '인생의 발견'이라는 책의 마지막 책장을 넘겼다. 그리고 조용히 책을 가슴에 품었다.

'우리 삶을 가치 있고 위대하게 만드는 28가지 질문'이라는 부제를 따라 저자의 답들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생기게 했다.

연우는 점점 치료가 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종이약국' 에서 받은 약들이 연우의 상처를 조금씩 조금씩 아물게 하고 있었다.

"엄마. 엄마." 고요하던 아침을 우진이가 폴짝폴짝 뛰며 연우에게 다가와 안겼다. 연우의 아침은 다시 생동감 있게 시작되었다.

"아버지 오늘 저녁에 별밤에 모인다고 하던데요. 먼저 가 계셔요."

"그래. 근데 와? 모이는교?"

"그게 봉우 씨 말은 다 같이 가까운데 일출 보러 가는 거 의논하자고 하던데요."

"일출? 그거 봐서 뭐 하게. 아무튼.."

"아버지도 해 뜨는 거 안 본 지 꽤 됐잖아요."

"..... 밥이나 더 주라."

"아버지. 요즘 아침도 많이 드시고 좋네요. 많이 드세요."

"요즘 밥맛이 너무 좋다."


봉우는 오전부터 별밤책방에 앉아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다.

"형.. 님 캠핑장이 나..을까요? 아니면 펜션..이 나을까.. 요?"

"그냥 있는 새벽에 가서 일출만 보고 오는거 아니야?"

"그래도 되는데...제 생각에는 전날 주변에서 자고 아침 일찍 일출 보고 오는것이 어떨까? 해서요..아니면 캠핑카..를 빌려서..."

"혹시 거기 캠핑도 되니?"

"밤..에는 모.. 르겠는데요. 작년에 가보니 가족..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새벽.. 에 캠핑카를 몰고 와서 라면 끓.. 어 먹던데요."

"그냥 봉우야 우리는 있는 차로 가서 컵라면 하나씩 먹고 오는 것도 좋지 않아?"

"그래... 도.."

"그럼 오늘 모여서 의견을 들어 보고 결정하자."

"네.."

봉우는 점심을 먹었는데도 별밤책방의 시계가 아직 1시를 가리키는 것이 잘못된 것 같아 수십 번을 핸드폰을 봤다.

"봉우야~"

"네.. 형님"

"그렇게 빨리 사람들이 보고 싶어?"

"그... 게...사실은 저...꼭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뭐? 캠핑?"

"아니요. 가족....들끼리 해,..돋이 보러가는거요. 해가 떠...오를 때 서로 손을 꼭 잡고 소원도 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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