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R] 구름 레시피

by 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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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겨울이 지나고 마침내 봄이 왔다. 달력은 아직 2월이었지만, 귀 끝을 스치는 바람은 겨울의 마지막을 알리는 것만 같았다. 재웅은 따뜻한 햇볕에 마음이 설렜다. 아니, 어쩌면 햇볕이 아니라 오늘 데이트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늘은 재웅이 데이트를 하는 날이다.


"먼저 오셨네요"

"아니에요, 저도 방금 도착했어요."


둘 다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어딘가 조금은 어색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오늘은 재웅과 예현의 세 번째 데이트 날이다.


"그럼, 갈까요?"


둘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그때 말했던 그 일은 잘 해결됐는지 가벼운 안부를 물었다. 안부 사이에 재웅의 진지한 목소리의 시시한 농담이 섞였다. 그다지 위트 있는 농담은 아니었지만 예현은 밝은 웃음으로 재웅이 머쓱하지 않도록 배려했다. 조금 걷고 나니 경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둘이 향하고 있는 곳은 낙산공원이었다.


"올라가다가 힘들면 얘기해요"

"이래서 운동화 신고 오라 했어요? 오늘 등산 제대로 시키겠네요"


예현은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내심 기대하는 눈치였다.


"올라가 보면 왜 가자고 했는지 알 거예요"


그리고 다시 소소한 이야기들이 시작되었다. 작은 규모의 공연장, 그리고 카페들로 둘러싸인 길을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덧 낙산공원 중앙광장에 이르렀다.


"힘들지 않아요?"

"힘들어요. 도대체 뭘 숨겨놓은 걸까 상당히 기대가 되네요"

"기대하세요. 저 가서 마실 거 좀 사서 올게요"


곧 재웅은 시원한 이온음료 두 페트를 들어 보이며 돌아왔다. 둘의 표정이 소개팅 첫날보다 더 밝아 보인 건 오늘 햇볕이 화창해서인지 아니면 재웅도 예현도 긴장이 조금 풀어졌기 때문인지 둘은 알지 못했다. 잠시 쉬고 난 뒤 둘은 천천히 다시 공원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 맞다 재웅 씨 취미가 요리랬죠? 저 요리 언제 해줄 거예요?

"예현 씨가 먹고 싶을 때요"

"지금인데?"


예현이 일부러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답했다. 그게 귀여워 죽겠다는 듯 재웅은 크게 웃었다.


"알았어요. 어떤 음식 제일 좋아해요?"

"음... 저 사실 양상추 샐러드를 제일 좋아해요"

"다행이네요."

"샐러드는 아무나 만들지만 제. 대.로. 만들기는 어렵다고요"


예현의 양상추 샐러드 강의가 이어졌다. 얼마나 신선한 양상추를 쓰느냐, 그리고 얼마나 일정한 두께로 썰어주느냐, 무엇보다 양배추와 곁들여지는 소스와 과일의 비율이 적절히 맞아야 하며 또 그 베리에이션이 얼마나 다양한지에 대해서 열변을 토했다. 마지막으로 플레이팅은 어디에 해야 이쁜지를 얘기하려는 순간 둘은 공원의 가장 높은 곳에 도착했다.


"낮에 오니까 또 새롭네요. 낙산공원은 맨날 야경만 보러 왔는데"

"그죠? 야경도 이쁘긴 한데.. 전 날 좋은 날엔 가끔 산책 겸 올라와요. 아, 예현 씨 이쪽 길도 가봤어요?"


이어진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잘 모르는 길이 나왔다. 이쪽은 별게 없겠거니 하며 가보지 않았던 길이라 예현은 처음 와보는 길이었다.


"이게 동대문역 쪽으로 이어지는 길인데 사람이 많지 않아서 좋아요. 뭐, 그것도 방송 타기 전 얘기긴 한데

방송 때 빤짝 이쪽에 엄청 오다가 또 요새는 시들해졌더라고요"


그의 말대로였다. 낙산공원 초입부터 가장 높은 곳까지 그래도 사람들이 꽤 있었는데 뒤쪽은 정말 인적이 드물었다.


"저쪽에 잠깐 앉았다 갈까요?"


둘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시원한 바람이 볼을 스쳐 지나갔다. 예현은 별게 행복인가 그냥 이런 순간순간이 행복이 아닌가를 생각하던 찰나 재웅이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저 예현 씨에게 고백할 거 있어요"

"뭔데요?"


설마 이런 뜬금없는 분위기의 고백인가. 그건 너무 분위기도 없고 경우도 없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빠르게 스쳐갈 때 그런 예현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재웅은 계속 진지하게 얘기했다.


"사실.. 낙산공원에 오자고 한 거, 예현 씨한테 요리해주려고 오라고 한 거예요"

"여기서요? 갑자기?"

"네, 여기에서만 돼요. 아니.. 저.. 사실 그게"


재웅은 주저하며 말을 이어갔다


"제가 제일 자신 있는 요리가 구름 요리거든요"

"에? 구름 요리요?"


예현은 이 사람이 제정신인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재웅은 계속 진지한 말투를 이어갔다.


"네. 믿기 힘드시겠지만."

"아니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재웅 씨 괜찮아요?"


재웅은 차분히 설명을 이어갔다. 구름 요리는 말 그대로 구름을 재료로 한 요리다. 구름은 저 하늘 위에 있는 하얀 구름 말하는 거냐 아니면 구름이라는 식재료가 있는데 나를 놀리려고 하는 거냐 묻는 예현의 질문에 저 하늘에 있는 구름이 맞다고 답했다.


"더 이해가 안 가는데요???"

"그럴 거예요. 충분히. 그럼 잠깐만 기다려요"


재웅은 가방에서 샐러드 볼을 꺼내기 시작했다. 예현은 눈 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30분 전만 해도 이성적인 말이 통했던 보통사람이었는데. 사실 미친 사람이었던 건가. 온갖 의문으로 가득 찬 채 그를 지켜보기로 했다. 그는 말없이 물티슈로 손을 닦더니 하늘 쪽으로 손을 뻗었다. 와, 이 사람 정말 미친 사람인가 생각하던 그때. 예현은 자신이 본 게 사실인지 의심했다.


진짜로!!?


재웅은 두 손을 하늘 높은 곳을 향해 쭉 뻗었고 구름 하나를 오른손으로 끝을 살짝 집더니 왼손으로 꼬집듯이 비틀자 정말 거짓말처럼 구름이 똑 떨어졌다. 아니 찢어졌다는 표현이 맞겠다. 찢어진 구름은 크기의 변화 없이 지금 예현의 위치에서 본 딱 그 크기로 샐러드 볼에 담겨졌다. 재웅은 조심스럽게 구름을 먹기 좋은 사이즈로 부수기 시작했다. 얼핏보기에는 솜을 찢는 것 같아 보였지만, 구름이 찢어질 때마다 양상추가 찢어지듯 나름 경쾌한 소리가 나는 것을 보니 구름 나름대로의 질감이 있는 듯했다.


"뭐예요? 이거?"


예현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눈 앞에 벌어지고 있었어도 그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명백한 사실이었다. 재웅은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그리고 본격적으로 구름 요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잘게 부순 구름에 미리 준비해온 신선해 보이는 과일들을 넣고 섞기 시작했다. 방울토마토, 오렌지, 건포도, 사과 그리고 견과류도 조금 넣었다. 마지막으로는 자기가 특제소스를 준비해왔다며 소스를 뿌렸다. 오리엔탈 드레싱을 베이스로 매실액을 넣어서 뭐가 다르다고 설명해줬지만 예현은 듣고 있어도 들을 수 없는 상태였다.


"지금 이거 꿈이에요?"

"꿈 아니에요. 먹어보면 아닌 거 알게 될 거예요"

"뭐예요 재웅 씨? 천사인가..? 아냐 귀신? 악마?"

"다 틀렸어요. 일단 이거부터 먹어봐요. 양상추 샐러드가 제일 좋다면서요"


재웅은 나름대로 플레이팅 연습도 했다며 그릇에 구름요리를 담기 시작했다. 처음엔 먹어야되나 망설였지만 플레이팅까지 세심하게 신경쓰는 이 사람은 분명히 예현이 알던 재웅이었다. 예현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인간은 아닌 것 같은 재웅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래 악마든 천사든 뭐 일단 한 번 먹어나 보자. 구름 샐러드라니 세상에. 조심스럽게 구름을 입에 가져갔다. 먹기 전 헛웃음이 나왔다. 용기를 내서 먹었다. 구름은 무슨 맛일까.


아삭


의외였다. 구름은 뭔가 솜사탕처럼 부드럽기만 하고 입에 넣는 순간 녹아 없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아삭한 식감이었다. 약간의 단 맛도 있었지만 강하지는 않았고 수분을 가득 머금고 있어 씹을수록 시원하고 경쾌한 소리가 났다. 사과만큼 단단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두부처럼 연하지도 않았다. 굳이 표현하자면 딱 양상추 정도였을까. 하지만 씹으면 씹을 수록 양상추보다도 더 가벼우면서도 경쾌한 느낌이었다. 예현은 구름의 식감에 놀라고 있었다. 아니 뭐야 이거. 뭔데 맛있어.


"맛있어요...."

"맛있으면 다행이네요"


재웅은 해맑게 웃으며 답했다. 하지만 예현은 이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구름 요리라니. 근데 그걸 먹는 나라니. 아니 무엇보다 이게 뭐라고 맛있다니!


"아니 근데 당신 도대체 뭐예요?"

"어... 그게 사실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요. 말씀드릴게요"


재웅은 말을 이어갔다.



* 이 글은 Random Restaurant 기획 글 입니다.

Random Restaurant, Weekly cuisine 프로젝트란?

그 주에 인기가 있었던 단어들을 무작위로 조합한 제시어를 공통으로 활용하여 산출물을 만들고 주 1회씩 공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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