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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욱 Dec 31. 2023

[2023 회고] 새로운 시작

호시호보의 한 해를 보내며, 이제는 Festina Lente

2023년도 지나간다

어느 때보다도 내게 의미가 깊었던 2023년도, 또 지나간다. 어릴수록 시간이 더디 가고 나이를 먹어갈수록 시간이 그렇게도 빨리 간다던데 23년이 이리 빨리 지나간걸 보니 나도 이제 분명히 나이를 먹긴 했나 보다. 그래도 올 한 해는 충만하게 보낸 것 같아 한 해를 떠나보내는 마음이 그리 무겁지만은 않다.


2022년이 그동안 길었던 터널을 지나 나오는 한 해였다면(그 길던 터널의 끝이 이제야 보인다) 올해 2023년은 터널을 나와 본격적으로  빠르게 달린 한 해였다. 그동안 어두운 터널을 지나왔다는 생각 때문인지 더욱 조급했고, 더욱 서둘렀다.


새로운 시작, 패션에이블(passion.able) 그리고 로컬브랜드 더쌀063

올해 1월 passion.able(패션에이블) 법인을 설립했다. 모두가 패셔너블하게 살 수는 없어도, 누구나 열정 있는 삶은 살 수 있다(Everyone cannot be fashionable, but Anyone can be passion.able)라는 생각으로 열정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우리는 열정적인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스스로를 향한 다정함이라고 생각(열정적인 너에게 필요한 딱 하나, 스스로에게 다정할 것) 하기에 이에 맞는 아이템들을 써 내려갔다.


우리 회사의 첫 번째 아이템으로 군산 신동진 쌀을 이용한 라이스밀크(Rice Milk)를 개발했다. 라이스밀크는 이제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해진 아몬드브리즈나 어메이징오트 같은 식물성우유(혹은 식물성음료)의 일종이다. 미국 블루보틀에서는 라테를 주문하면 오트밀크가 기본이며, 오트우유로 유명한 오틀리는 한때 물량이 달려 없어서 못 팔았던 적이 있을 정도로 식물성우유는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오틀리의 성공사례(졸라 겁대가리 없는 오트우유, 오틀리 성공이유)를 분석하며 우리 쌀, 그중에서도 프리미엄 품종인 신동진 쌀을 이용한 라이스밀크가 충분한 시장성과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라이스밀크는 우리나라의 오랜 사회문제인 쌀 초과공급도 해결할 뿐만 아니라 현재 시장에서 소비자들이 겪는 문제까지도 해결하는 아이템이다.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깊이 있게 이야기하며 서베이와 인터뷰를 진행한 결과 소비자들은 기존의 제품의 너무 밍밍한 맛과 생곡물 특유의 비린내를 싫어한다는 문제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식물성우유는 2022년 약 7,000억 원 규모를 형성하며 시장성이 이미 충분히 검증된 카테고리였으며, 이러한 시장에서 더 나은 향미의 라이스밀크를 만들어 낸다면 시장의 문제와 동시에 우리 사회의 문제까지도 해결할 수 있음을 알게 됐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스페셜티커피 로스팅을 쌀에 적용하여 생곡물 비린내 대신 고소한 향을 극대화하고, 효소처리를 통해 쌀이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100% 천연의 단맛을 극대화한 라이스밀크를 개발했다.


나는 로컬브랜드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잠재력을 가진다고 믿는다.(로컬(=시골)에는 미래가 있을까?) 찍어내듯이 만든 어디선가 본 듯한 비슷한 브랜드들 사이에서 잘 설계된 로컬 브랜드는 다른 브랜드는 흉내 낼 수 없는 분명한 다름을 선사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로컬브랜드는 가내수공업 구조를 가지고 있어 스케일업에 불리하다는 구조적 단점이 있다. 우리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부터 대량생산이 가능하고, 언제든지 스케일업이 가능할 수 있는 구조를 찾았다. 그렇게 수소문한 결과 2022년 매출 규모 약 1,764억의 서울F&B와 협력 관계를 형성하고 대량 생산 까지도 갖췄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갖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나름 열심히 기획하고 치밀하게 준비한다고 하고 야심 차게 비즈니스를 시작했지만, 뚜껑을 열고 보니 역시나 여기 쿵 저기 쾅 사건 사고의 연속이었다. 비즈니스 자체를 처음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까지는 누군가 잘 만들어 놓은 브랜드를 잘 선별하고 잘 제안하며 판매하는 일만 해봤지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어내는 것은 완전히 처음이었다.


처음 하는 일들이 대부분이었으니 시행착오가 더 많았다. 디자인 작업을 하면서도 최선의 디자인을 찾기 위해 시안을 몇 번을 뒤집었고, 제품 개발 과정에서도 균일한 로스팅 정도, 예기치 못한 칼로리 이슈, 급작스러운 생산 일정의 변화 등 문제가 매일같이 터져 나왔다. 일을 하다 보면 있을 수도 있겠다고 예상은 했지만 예상했던 타임라인보다 일정이 점점 뒤로 미뤄지고 통장은 말라갈 때마다 마음은 초조해져만 갔다.


게다가 이제 더 이상 몸도 예전 같지 않았다. 올 초에 고요산혈증으로 굉장한 통증을 겪기도 했고(처참히 깨진 무릎), 가을쯤엔 심각한 독감에 걸리기도 했다. 독감 때문에 일을 못할 거라고 상상조차 못 했는데 며칠을 누워있다 보니 더 이상 내가 가진 치유력을 믿지 못하게 됐다.


이번에도 역시나 제대로 처맞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함께하는 좋은 사람들 덕분에 힘을 낼 수 있었고, 어려운 와중에도 우리 나름의 성과도 거둘 수 있었다. 제품이 정식으로 출시되기 전에도 우리 팀이 가지고 있는 역량과 가능성, 그리고 로컬브랜드의 가치를 높게 봐주신 분들 덕분에 큰 힘이 된 한 해였다.


중기부가 인정하는 로컬크리에이터가 되기도 했고, 현대차정몽구재단에서 지원하는 H-온드림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mysc와 함께 임팩트 스타트업에 대한 이해를 더 깊게 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스마일게이트 오렌지플래닛과 전주창업경진대회를 함께 준비하며, 우리 비즈니스를 더욱 단단히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H온드림데이상(인기상), 전주창업경진대회 대상을 수상 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라이스밀크 레시피 특허, 더쌀063 상표권도 출원할 수 있었으며, 누구보다도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브랜드매니저 기린님도 새롭게 모셔올 수 있었다.


다양한 행사에서 약 450여 명의 고객들을 직접 만나고 시음을 진행하며 우리 제품의 가능성을 확신할 수 있었고, 또 심지어는 제품이 나오자마자 꼭 받아보고 싶다는 고객분들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정식 출시가 되기도 전에 별다른 홍보 없이도 예약 구매로 매출을 만들어내기까지 했다.


계획보다 꽤 많은 것들이 미뤄졌지만 동시에 처음 기대했던 것보다 더 좋은 분들을 만날 수 있었고, 더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고, 더 큰 가능성을 품을 수 있는 감사한 한 해였다. 분명히 세게 처맞는 한 해이기도 했지만 호시호보하며 마음껏 내달리며 좋은 분들과 함께할 수 있는 감사한 한 해였다.


그리고 7월의 내가 12월의 나에게 쓴 편지

올해에는 내 인생에 가장 소중한 사람을 만났고 소중한 루틴을 나눴다. 그 루틴은 1년을 마무리하며 내년의 나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었는데, 올해는 그 시기를 조금 놓쳤기에 7월에서야 12월 31일의 각자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막상 올해를 마무리하며 편지를 열어보니 처음의 기대보다도 훨씬 더 한마디 한마디가 마음에 와닿았다.


나는 나를 너무도 잘 알아서 내가 놓치고 있을 법한 지점들을 콕콕 집어 이야기 해줬다. 일에만 매몰되느라 스스로를 향한 다정함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승려와 수수께끼'를 읽고 느꼈던 것처럼 지금의 여정이 충분히 설레고 성장하는 여정인지를 다정히 물었다. 동시에 수많은 고민 속에 길을 잃기보다는 '길은 가면서 만들어진다'며 한발 내딛자며 용기를 주었다. 누군가의 단단한 지지와 응원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상기시키며 일상의 감사함을 잊지 않도록 상기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일과 삶 그리고 관계 사이에서 우선순위를 바로 하고 그 가운데서 중심을 잘 지키자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무엇보다, 7월의 나는 12월의 나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남겼다. 한 번도 스스로에게 다정하게 칭찬을 해보거나 수고했다고 말해본 적 없었던 것 같은데 7월의 내가 건네는 그 말이 매일같이 일에 치여 다음 해야 할 일들만 끊임없이 고민하는 12월의 내게 큰 위로가 됐다. 소중한 사람 덕분에 또 한 번 소중한 추억을 더했다.



올 한 해 내 인생에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을 만나 수많은 아름다운 경험을 했다. 사업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장기간 여행을 가보며 오랜 기간 쉬어보기도 했고,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하며 새로운 세계에 진입하기도 했다. 함께하는 1년 동안 많이도 웃었고 곁에서 함께하며 삶에 감사하는 방법을 배웠다.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도 작년의 나보다 올해의 나는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어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게 해 주었다.


올해 겪은 또 다른 아름다운 일 중에 하나는 천사 같은 조카의 탄생이었다. 거리와 시간의 제약으로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가는 조카의 모습을 보면서 혼자서 미소 지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가정 안에 새 생명이 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또 그 축복 속에서 얼마나 가족들이 더 단단하고 따뜻하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도 알게 됐다.  


2024년, Festina Lente (천천히 서두르자)

한 때 라틴어를 잠깐 배운 적이 있다. 수많은 라틴어 문장을 외웠지만 지금까지 기억하는 문장은 단 두 문장뿐이다. 하나는 소개팅에서 그렇게도 많이 써먹었던 'da mihi multa basia(내게 키스를 퍼부어 주세요)'이고 다른 또 하나는 'festina lente(천천히 서둘러라)'다. 첫 문장이야 라틴어 할 줄 안다며 꺼내기 재밌는 문장이었기에 기억에 남았지만, 천천히 서두르라는 festina lente는 당시에는 어떻게 서두르는 걸 천천히 할 수 있냐는 말인지 도대체 이해하지 못해 기억에 오래 남았다.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좌우명이었던 Festina lente를 검색해 보면 돌고래와 닻을 함께 그린 그림이 검색된다. 천천히 서두르라는 모순된 표현 속에는 나만의 조화를 찾으라는 주문이 숨겨져 있다. 나는 돌고래와 닻이 festina lente를 가장 잘 표현한다고 생각하는데, 빠름을 상징하는 돌고래와 단단한 중심을 상징하는 닻이 함께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나의 중심을 분명히 잡을 수만 있다면 마음이 급해 빠르게 일을 쳐내는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천천히 서두르는 방법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올 한 해 조급한 마음에 어떻게든 '빠르게' 해결하려고 하다 보니 마찰도 많이 생기고 그 템포를 계속 이어가자니 나 스스로도 굉장히 숨이 가빴다. 어떻게든 일을 하나라도 빨리 처리하고 또 다른 일을 하려 하다 보니 에너지도 빠르게 소진됐다. 어느 순간 지금 타이밍에는 '더 하면 좋을 일'보다 '반드시 지금 하지는 않아도 될 일'을 추리고 우선순위를 세우는 것들이 더 중요하다고 느껴졌다.


과거 이성당 김현주 대표님을 뵈었을 때 해주셨던 조언은 '열심히 한다고 120% 하려고 하지 말고 80%만 하려고 하라'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이루신 분이니 여유에서 나오는 말씀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120%로 달리다 보니, 120%의 속도로는 더 오랫동안 지속가능하게 가기 어렵다는 사실을 쉽게 알게 됐다. 120%로 금방 소진되기보다는 80%의 준최선으로 오랜 기간 지속가능하게 일을 하는 것이 내가 사랑하는 일들을 더 잘 해내는 방식이란 걸 이제야 깨닫는다. 신중하게 움직이며 꾸준히 하나하나 해야 해 나갈 일들을 해가는 것이 나의 festina lente라고 생각한다. 차석용 님의 호시우보의 우보(소걸음)도 아마 이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다.


2024년 그런 마음으로 festina lente 하게 우보를 걸어가며 살아보기로 했다. 무슨 일이 내 앞에 벌어질지는 몰라도 내일이 기대된다.


난 앞길이 무지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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