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본 만추는 김혜자 배우가 나오는 흑백영화였다. 고등학생인지 중학생인지 하던 시절 '주말의 명화'인지 '토요명화'인지 그런 데서 방영하는 것을 본 것이다. 그땐 이해 안 되는 어른들 이야기였다.
하노이에 가을이 왔다. 그럼 도대체 만추는 언제 오는 것일까? 6년의 경험 상 하노이의 가을은 소리 없이 와서 소리 없이 간다.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지 않으면 늦가을을 잡아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영화 만추의 이야기도 뭔가를 잡아내려고 하면 마지막에 허무할 가능성이 크다. 이 영화는 그렇게 흘려버리듯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와중에도 한 가지 손에 잡히는 팩트는 우리 탕웨이가 2011년 작 만추에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탕웨이는 쌍꺼풀이 없다. (https://brunch.co.kr/@kkwontd/98#comment) 한 때 한국에서 그녀가 주연한 어떤 영화가 유행했을 때 한국의 말言과 글論은 특이하게도 그녀의 겨드랑이 털에 관심을 집중했다. 영화의 배경이 일본 제국주의가 주변국을 유린하고 있던 1930년대라는 점, 영화 속 탕웨이의 희생을 우리 조상 여인들도 했었다는 점(고애신 화이팅), 그리고 당시 민중들의 항일 운동이 치열했다는 점 등 집중할 것들이 많은데도 펜 끝은 하나같이 그녀의 겨드랑이 털을 향해 있었다.
만추는 1966년에 처음 상영되었다. 이만희라는 천재 감독이 만든 순수한 한국영화다. 신성일, 문정희 주연이다. 현재 원본 필름이 유실되어 볼 수가 없다. 나운규의 '아리랑', 최초 한국영화 '의리적 구토', '오발탄' 등의 한국영화들도 원본 필름이 없다. 대국일수록 역사의 기록과 보전에 매우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런 면에서 별로 잘한 것 없는 조선왕조도 그 실록 하나만은 인정해주고 싶다. 정통성이 없는 자들과 흑역사를 지우고 싶은 자들이 득세하는 시간 속에서 그자들은 사실을 덮고, 왜곡하는데 열을 올렸을 것이다. 이런 문화적 가치에 관심이나 있었겠는가.
이만희 감독 : 1931.10.6 ~ 1975. 4.13 요절했다.
영화계의 척박한 환경도 한몫을 했겠다. 예술혼에 불타는 영화감독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들은 항상 제작비에 목말랐을 것이고, 영화사는 상혼에 불탔을 것이다. 영화들을 보전하여 후세들이 보고, 느끼고, 계승 발전시키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에는 모두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기록의 보전에도 분명 돈이 드는데 나라도, 개인도 돈이 있을 시기가 아니었으니까 이해는 된다. 아쉽고 안타깝다.그래도 고생했던 선배들의 애환을 봉준호 감독이 위로해줬다고 생각하고 넘어가자.
영화는 그 후로 네 번이나 리메이크된다. 72년에는 원작에 반한 일본 감독이 '약속'이라는 타이틀로 영화를 찍었고, 75년에는 '육체의 약속'이라는 외설 버전이 나오기도 했다. 내가 처음 본 버전은 81년에 다시 만들어진 것이다. 여자가 교도소를 나오게 된다는 만추의 설정은 박찬욱 감독이 '친절한 금자씨'를 만들 때 분명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내 멋대로 생각해 본다.
그리고 2011년 만추. 잠이 안 올 것 같은 시애틀, 가본 적도 없지만, 거기로 향하는 버스에서 둘은 만난다. 불세출의 리정혁 동무, 아니 현빈(훈)과 탕웨이(애나)가 만난다. 교통비 대납의 채무관계가 둘을 이어주는 첫 매개다. 훈의 직업은 상간남, 애나는 남편을 죽였다는 누명을 쓴 여죄수다. 어머니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3일간 특별 보석된 애나, 추레한 옷을 입었지만 훈은 그녀가 여배우임을 알아차렸는지 호감을 가진다. 결국 큐와 컷을 날린 사람에게 빼앗길 사랑을 시작한 훈. 쯧쯧.
스티븐 킹이 '쇼생크 탈출'의 원작 소설을 썼을 때 '만추'를 참고했을 거라고 또 내 멋대로 생각해 본다. 배우자를 죽인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사람의 이야기. 앤디 듀프레인은 탈출해서 지와타네호에 갔지만 애나 쳉은 감옥으로 돌아간다. 애나와 훈은 서로 좋아했지만 그들의 3일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한겨울이었으면 체온이라도 필요했을 테고, 한여름이었다면 스킨십이라도 있었을 텐데, 늦가을은 쓸쓸하게 아무 동기부여도 하지 못했다.
시애틀의 늦가을과 탕웨이의 아무렇지도 않은 눈동자, 현빈의 짜증나는 외모, 아무 일도 없어서 가득 차오르는 영화, 만추다. 가을이 오면 자연스레 그리웁고 싶은 걸까? 지난 주 이발사가 내게 염색을 권했다지만, 그래도, 가을은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