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알드 달은 영국의 소설가다. 염력소녀가 등장하는 영화 '마틸다'가 그의 소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염력소녀 마틸다가 분재소녀 마틸다 대신 레옹과 파트너를 이루었다면 레옹이 그렇게 허망하게 가지는 않았을 텐데 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가 1964년에 쓴 '찰리와 초콜릿 공장'도 영화로 만들어졌다. 좀 경이롭게도 영화 제목은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다. 더 놀라운 건 영어로는 'Charlie and the Chocolate Factory'라는 것이다. 주연이 박보검인 줄 착각하는 사람도 있다. 찰리는 커서 좋은 의사 Good Doctor가 된다.
우리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인 2005년에 개봉했는데 함께 여러 번 봤다. '윌리웡커~ 윌리웡커~' 하는 노래가 나오면 같이 막 춤추면서 따라 부르곤 했다. 그때는 어린 자식들을 당연히 그 영화가 주는 교훈대로 키우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최근에 우연히 그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 영화에는 아이들과 나눈 모든 것과 나눴어야 했던 모든 것, 그리고 나누지 못했던 모든 것이 다 담겨 있었다. 또, 로알드 달이 경고한 것들을 어쩌면 하나도 빼먹지 않고 그대로 저지르고 말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로알드 달의 천재성은 미래의 교육 및 사회 문제를 대부분 정확하게 예측했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네 명의 어린이를 예로 들어 과다 경쟁의 폐단, 식탐과 비만 문제, 비디오 게임의 폐해와 나쁜 언어 습관, 물질만능주의와 응석받이 등을 지적한다. 그리고 소설을 쓸 당시보다 그 문제들은 더 심각해져서 우리 곁에 이미 현실로 다가와 있다. 그렇게 다시 만난 챨리의 초콜릿은 달콤 쌉싸름한 맛으로 다가왔다.
멕시코 소설 및 영화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의 '달콤 쌉싸름'은 사실 우리말에 원래 있던 표현이 아니라고 한다. 영어 bittersweet(씁쓸하면서 달콤한, 괴로우면서도 즐거운)을 우리말로 맛깔나게 옮겼다고 보면 될 것 같은데 '쌉싸름'도 맞춤법 상으로는 '쌉싸래'가 맞다고 한다. 상당히 창의적으로 탄생한 표현이라고 여겨진다. 나는 개인적으로 bittersweet이라는 단어를 영화 '보디가드'에서 위트니 휴스턴이 부른 'I will always love you'에서 처음 접했고, 그 후 기억에 오래 남았다. 'bittersweet memories~~'
영화의 원제는 'Como agua para chocolate'로, 영어로는 'Like Water for Chocolate'이라고 직역되었다. Bittersweet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으므로 혹 일본에서 그랬나 의심이 되지만, 일본에선 일본답게 '赤い薔薇ソースの伝説'(붉은 장미 소스의 전설)로 번역되었다고 하니 그들도 용의선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렇게 되면 누군진 모르지만 한국 번역가 또는 카피라이터가 이 제목을 창작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매우 칭찬한다. 여담으로 이 영화는 대학교 2학년 때 야하기로 소문이 자자했으나 나는 보지 못 했다.
꽤 살만한 집들의 망쳐진 아이들 네 명과는 대조적으로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찰리는 인성교육의 표본으로 등장한다. 삼대 일곱 명이 한집에 살며, 양배추 수프로 끼니를 때우고, 무너진 지붕 아래 다락방에서 잠을 자고, 아버지는 실직을 걱정하는 노동자인 찰리. 하지만 그 와중에도 찰리는 배려심 많고, 어른을 공경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예의 바르고, 어린이다운 탐구심과 상상력도 가진 참 상주고 싶은 아이로 자라고 있다.
전 세계에 다섯 장 밖에 없는 골든티켓을 거머쥐었을 때도 찰리는 초콜릿 공장으로 가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티켓을 팔아서 생활비에 쓰자고 제안한다. 다행히도 진짜 어른다운 어른인 할아버지의 조언으로 돈보다 꿈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네 명의 악당들이 알아서 탈락해주고 혼자 남은 찰리에게 윌리웡커가 초콜릿 공장을 통째로 물려준다고 했을 때도 찰리는 가족을 떠날 순 없다며 거절한다. 결과는 이렇고 저렇고 해서 해피엔딩으로 끝이 나지만 그 예쁜 마음은 가슴을 저리게 한다.
누군가 자랑인지 한탄인지 모를 얘기를 하나 했는데 내용은 이렇다. 아이들을 어릴 때부터 해외여행을 데리고 다니면서 최고급 호텔이나 리조트에 묶어왔는데, 유럽여행을 간 어느 날 아이가 심각하게 뭔가를 물어봤다고 한다.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 앞에서.
"아빠, 우리 집 망했어?"
"갑자기 왜?"
"호텔이 너무 후져서 아빠가 돈이 없는 줄 알고..."
파리 어느 거리의 유명한 부띠끄 호텔을 잡았다는데 그것이 5성급만 보던 아이 눈에는 초라해 보였다는 설명이다.
Hotel du Danube Saint Germain
찰리는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행복할 수 있을까? 서울 아파트는 커녕 경기도 변두리 단독주택에 양가 조부모와 함께 사는 가난한 찰리는 과연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엘사'라는 매우 bittersweet 한 단어를 창작해 내는 또래들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여기서 로알드 달이 하나 놓친 예측이 있다. 자본주의가 하나의 국가 경제 체제에서 일종의 사상으로 변태하여 빈육부식貧肉富食하는 동물의 세계가 펼쳐질 것이란 사실을 그는 예측하지 못 했다. 상상도 못 했을 가능성도 있다.
비싼 비행기로 12시간을 날아간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 앞에서 집이 망한 걸로 느끼는 아이는 로알드 달이 상상한 다섯 아이들과는 완전히 또다른 캐릭터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전쟁도 아니고 비디오 게임에 아들 하나를 잃은 부모로서 왜 그의 이야기를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남는다. 우리는 어디로 가서 닿을 것인가? 아무 힘없는 필부는 지켜볼 밖에 도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