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놀라 홈즈 Enola Holmes'. 명탐정 홈즈에게 여동생이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코난 도일 경의 셜록 홈즈 시리즈를 문고판으로 탐독하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얼룩 끈', '너도밤나무 저택의 비밀', '머스그레이브가의 문장', '버스커빌가의 개', '춤추는 사람 인형' 등 제목만 봐도 그때 느낀 궁금증과 박진감에 흥미진진해진다. 그때는 분명 여동생에 대한 얘기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넷플릭스는 어린 셜록이 엄마 아빠를 조르지도 않았는데 뜻밖의 여동생을 선물한다.
'앤 셜리 Anne Shirley'.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하는 노래와 함께 연상된다. 요즘 시각으로 보면 심각한 '여성 외모 비하'에 해당하는 이 가사는 어릴 적 TV에서 했던 만화 '빨강머리 앤'의 주제곡이다. 일본에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인데 일본은 당시 서양 소설을 바탕으로 이런 류의 만화 시리즈를 많이 만들었다. 소위 '세계명작극장'으로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보물섬', '플란다스의 개', '톰 소여의 모험' 등 그 수가 엄청 많다. 집요하고 대단하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지구를 집어삼킨 2020년, 고립된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 중 으뜸은 유튜브와 넷플릭스였다. 나도 예외는 아니라 예전 같았으면 외부 활동과 저녁 약속과 주말 골프로 얼룩졌을 시간들을 집에서 하는 여가 활동과 살림살이로 채웠었다. 그중 하나로 넷플릭스를 보게 되었는데 그 일련의 시청 속에 문득 느끼는 한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여자들이 참 대단하군.' 하는 생각이었는데 이것조차도 옛날 사람에게서 나온 여성 차별적 발상일 수 있다.
그 시작은 '셜록 Sherlock' 시리즈였다. 현대를 배경으로 원작을 각색한 것으로 과거에 없던 주관적이고 독립적인 여성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 시리즈 마지막에 셜록 홈즈의 여동생에 대한 암시가 잠깐 나온다. 그리고 이어서 내가 본 영화는 '뮬란 Mulan'이었다. 중국 고전을 볼 때 여성은 주로 미인계에 등장한다. '삼국지연의'에서 왕윤이 동탁과 여포를 이간질할 방법으로 자신의 의붓딸 초선을 이용한 것은 많이 알려진 대목이다. 그런 전통적인 수동성과 무기력의 인식을 깨고, 아버지를 대신해 전쟁에 참가해서 무공을 세우고 나라를 구하는 여성 영웅이 등장하니 그녀가 바로 뮬란이다.
뮬란 다음으로 몇 해 전 아내가 눈을 못 떼고 보던 '미스터 션샤인'을 보게 된다. 여기에 또 우리나라 여성 영웅이 등장하니 그녀의 이름은 '고애신'. 그녀는 사대부가 규수지만 몰락하는 조선을 구하기 위해 스나이퍼가 된다. 그녀는 또 다른 기구한 운명의 남자 '유진 초이 Eugene Choi'를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사랑과 구국의 대업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다. 종국에 남자는 여자의큰 뜻을 더 존중하여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여자를 지켜준다. 남자가 여자를 지켜주는 이야기는 많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타이타닉', '카사블랑카' 등등. 하지만 '여성의 웅지雄志'까지 지켜준 이야기는 이번이 처음이지 않나 생각해 본다. 개인적으로.
그다음 시청한 시리즈가 '앤 위드 언 이 Anne with an E'다. 작가 루시 몽고메리의 철학과 경험을 담은 소설이 원작인데 원제는 '초록 박석 집의 앤 Anne of Green Gables'다. 이것이 일본에서 '아까게노안赤毛のアン'으로 한번 외모 비하를 당했으며, 한국에서는 주근깨에 빼빼 말랐다고 동네방네 노래노래 불러서 그녀를 두 번 괴롭히는 격이 되었다. 물론 이런 그녀의 외모에 대한 묘사는 팩트다. 하지만 그녀의 주장처럼 자신이 그렇게 알고 있는 것과 남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애니메이션이 다소 그녀의 소녀 감성과 불우한 배경 극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이번 시리즈는 그녀의 독립성과 자주성, 그리고 여성의 감성이 폭력적이고 차별적인 사회 부조리를 혁파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전해주는 것 같다. 맞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앤이 길버트의 머리를 흑판으로 후려깠던 것처럼 여성에게도 폭력성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만은 없지 않느냐는 견해를 조심스레 펼칠 수도 있을 것 같다.경험상 대부분 남자가 원인 제공을하지만 ㅋㅋ)
같은 분위기로 마지막 정점을 찍은 영화가 바로 '애놀라 홈즈 Enola Holems'다. 집안 사정상 저택에 엄마와 단 둘이 살게 된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특별한 가정교육을 받는다. 요약하면 '한 명의 독립된 인간으로서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여성' 정도다. 그런 목표 치고는 조금 과하다 싶은 스펙트럼의 조기교육을 받게 되는데 무술, 궁술, 검술, 수학, 과학, 문학, 지리, 미술 등이 다 포함된다. 그렇게 인간 병기로 성장한 그녀는 어리숙한 남자를 보호해주고, 사람들을 구하며, 여성 참정권을 지켜내고, 악당을 무찌른다. 물론 그 남자와 살짝 사랑의 감정도 느끼지만 사랑보다는 그녀의 삶이 더 우선이다. 따라란~~
[사족] 엄마의 교육에서 빠진 것이 있다면 전통적인 신부수업과 엄마의 주특기인 '어둠의 마법' 정도다. 오빠인 셜록 홈즈도 그녀를 돕기는 하는데 기왕이면 남는 '크립토나이트' 한 조각 정도 떼줬더라면 그녀가 그런 개고생은 안 했을 텐데 하는 생각도 해 봤다. 물론 일레븐 Eleven, 아니 에놀라 Enola 그녀도 본인이 코피 소녀임을 감추고 일반인처럼 행동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정말 기묘하다.
흔히들 페미니즘이란 말로 앞에서 말한 생각들을 통칭한다. 한창 베트남에서 저 시리즈와 영화를 볼 때 당시 한국에 있던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 말을 했다가 한방 먹었다.
"여보. 요즘 넷플릭스는 전부 다 페미니즘이야."
"페미니즘이 아니고 휴머니즘이야."
"아, 네."
우리는 아들 둘이라 이 방면에서 또 조금 안 와 닿는 부분이 있는데, 그 아들들도 미래에(현재 일 수도 있고) 꽤 높은 확률로 여성들과 사랑하며 같이 살아야 하기에 바로 지금 나도 생각의 훈련과 개선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다. 또 그들의 삶에서 한발짝 비켜서는 연습도 미리 하면 좋겠다. 삶은 배움과 깨달음의 연속이다. Humanism is all arou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