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음vs웃음
울고 싶을 때가 있다. 그냥 눈시울이 붉어진다거나, 눈물이 찔끔 난다거나, 가슴이 뭉클해지는 정도가 아닌, 정말 문자 그대로 울고 싶을 때가 있다. 우는 것을 나타내는 의성어로는 ‘엉엉’이 있다. 한글은 위대하지만, 사실 울 때 ‘엉엉’이란 소리를 듣기는 어렵다. 비슷하게 ‘어~ 어~’ 하는 소리가 나는 것 같긴 하다. 사람들은 울음을 토하기도 하고, 땅을 치고 통곡하기도 하고, 대굴대굴 구르면서 울기도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따라 운다. 정어리 떼나 참새 떼는 포식자의 공격에 집단행동으로 대응하는데, 이건 공감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동기화라고 한다. 조금 발달한 뇌를 가지게 되면 쥐들처럼 지진을 미리 감지하고 집단행동을 취하기도 하는데, 코끼리, 돌고래는 좀 더 진화한 공감 능력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류의 친구 개, 고양이, 말 등도 감정을 나눌 수 있으며, 침팬지, 고릴라 같은 영장류에 이르러서는 기쁨, 슬픔, 심지어 죽음에 대한 애도까지도 나눌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영장류인 사람도 남을 따라서 운다.
“Apes together strong.” in the movie 'Planet of the apes'
남자가 엄청난 존재로 여겨졌던 수렵, 농경, 전쟁 시대의 사조를 성장기에 주입받은 세대가 있다. 그 시절의 대표적인 격언으로 “남자는 세 번 운다.”는 말이 있다. 태어날 때,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 나라가 망했을 때. 문제는 울지도 않았지만, 그때는 웃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냥 뻣뻣한 인간이 잘난 놈이던 때였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시절에도 배삼룡, 서영춘이 있었고,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도 있었다. 그렇게 세상이 좀 표리부동하고, 가식적이던 시대였다. 노래를 잘 부르거나 춤을 잘 추면, 보고 신명 나 하면서도 천하다고 놀리던 이상한 시대.
그에 비해 여자의 눈물은 매우 간교한 것으로 치부하는 사조도 있었다. 노래 한 곡이 그런 억울한 상황을 변호했는데, 아무리 괴로워도 웃던 그녀가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던 날 내 곁을 떠나갔다는 그 노래. 그녀는 괴로워도 참고 웃다가 마지막에 진정성 있는 눈물을 남기고 떠난 것이다. 하지만, 최근까지도 아내의 눈물을 소재로 한 농담이 있는데, 동남아 지역으로 주재원 발령을 받아 가면서 아내가 세 번 운다는 내용이다. 처음엔 낯선 국가로 귀양 가는 것 같아 두려워서, 두 번째는 막상 가보니 너무 좋았는데 귀국 발령이 날 때 슬퍼서, 세 번째는 한국에 와서 설거지하면서 갑자기 운다는 것이다. 내가 왜 이런 걸 하고 있나 하는 서러운 생각이 들어서. 일부 우리나라와 소득 격차가 큰 국가에 가면, 가사도우미를 두고 생활한다는 풍조를 꼬집은 것인데, 그렇게 생활하지 않는 사람도 많은 것으로 안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나 할까. 여하튼 여자의 눈물과 남자의 눈물은 그 경중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해본다.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이 우는데 그렇게 따라 울고 싶었다. 김 부장의 아내도 우는데 내 아내가 우는 것 같았다. 꿈과 희망이 넘치던 젊은 날은 가고, 중년이 되어 직장생활의 후반부를 지나다 보면, 모두 그렇게 서럽고 슬퍼지는가 보다. 드라마 대사처럼 뭐 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다. 박범신의 『은교』에도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라는 문구가 나온다. 그냥 열심히 살고, 때가 되면 하던 일을 멈추고 또 다른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인생이란 생각이 든다. 월간 『좋은 생각』을 읽는데 이런 대목이 나왔다. 어떤 자리에 김 부장 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얘기를 나누다가 누가 조금 울었고, 우는 그를 달래려던 사람이 따라 울었고, 다 같이 웃었다고 한다. 그렇게 울다 보면 웃게 되는 게 또 인생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