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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멧별 Jun 10. 2020

코로나19 시대에 열이 39℃라니

그렇게 소리 없이 병은 찾아왔다.

오만 년 만에 약속이 다 비워진 주말, 일요일 오후 5시. 냉동실을 뒤지던 나는 성애가 잔뜩 낀 반건조 오징어를 발견한다. 대충 수돗물에 헹궈서 성애를 제거하고 프라이팬에 굽기 시작했다. 그 단백질 타는 냄새와 집게 끝에 느껴지는 쫄깃함이 한치의 의심도 허락하지 않았다. 간식은 안 먹어도 된다는 그 단순한 건강 상식도 무시해 버렸다. 아내가 있었으면 말렸을 텐데 역기러기 독거노인은 방종을 떨고 있었다. 그렇게 맛있게, 소리 없이 병은 찾아왔다.


한 시간이 지나자 배가 아프고 설사를 했다. 또 조금 있으니 오한이 들고 근육통이 왔다. 끙끙 앓다가 집에 있는 체온계를 귀에 꽂으니 38도가 찍혔다. 옛날에야 배 아픈데 누가 열을 재겠냐마는, 코로나19 시대에는 몸이 이상하면 열부터 재게 되는 것이다. 열이 38도라는 사실에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복잡함도 잠시,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생각이 희미해졌다. 열이 너무 오른 것이다. 다시 꽂으니 섭씨 39도.


살아야 한다. 반드시 살아서 출근도 하고 고국산천의 가족도 만나야 한다. 그런 생각으로 행동을 시작했다. 일단 복통을 달래 보려켜놨전기요를 끄고 이불킥을 했다. 약상자를 뒤져 꼭 스타카토로 읽어야 하는 화....과 유산균 및 우르소데옥시콜산이 든 소화제를 동시 복용했다. 옷을 가벼이 입고 일단 다시 누웠다.


옛날에 우루사 선전할 때는 분명 우르소데옥시콜'린'산이었는데 요즘은 '린'을 빼고 부르나 보다. 뭔 소리래? 고열로 집중력이 흐려지는 것이야, 헛생각이 드는 것이야. 체온계를 수시로 뽁뽁 찍어보니 계속 38, 39도였다. 머리가 멍한 것이 잠이 오는 것 같은데, 잠이 들면 안 될 것 같고, 자다 깨다를 반복하는 밤이 가고 있었다.


어라 근데, 이거 코로나19 아닌가? 인터넷 증상 리스트에 내 증상 다 있고, 내게 호흡기 증상만 없었다. 응급실? 아니다. 여기서 응급실 함부로 갈 일이 아니다. 자세한 설명은 않겠지만 어쨌든 가능한 최후의 카드가 되어야 한다. 특히 코로나19 시대에 외국인이라면 바로 격리될 수도 있다. 그건 아니다. 여권을 금고에서 꺼내어 베개 옆에 두고 핸드폰을 충전시키고 다시 눈을 감았다.


직장에서 아침마다 코로나19 방역조치로 체온 체크를 한다. 내일 아침 이상태로 출근하면 분명 난리가 날 것이다. 현지 직원들이 경계하고 누군가 보건당국에 신고할지도 모른다. 초기에 한국기업에서 그런 일들의 소문을 들은 차였다. 그 당시 현지인들의 공포와 경계는 이해 못 할 것이 없다는 생각, 변함이 없다.


그런데 정작 내가 열이 나니 이것을 어쩌란 말인가. 나는 출근했다가 보호장구를 한 요원들에게 끌려가는 것인가. 직장은 나 때문에 폐쇄되고 업무는 마비되고. '도대체 어디를 싸돌아 다니다가 걸렸냐'는 회사의 질타가 쏟아지고, 불명예스러운 한국 복귀를 하게 되는 것인가. 그전에 타향 만 리에서 불귀의 혼이 되는가. 자다 깨다 하는 사이 이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내가 내 보험은 알고 있나. 동료들이 한국에 있는 아내 연락처는 알고 있나? 둘째는 대학입시가 있는데 내가 방해가 되면. 내가 없으면 애들 등록금은. 첫째는 학교 공부에 흥미를 못 찾는 거 같던데. 노후 준비도 하나도 안 되어 있는데. 큰 문젠데. 한번 안 좋은 생각이 시작되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설국열차처럼 거칠 것이 없었다. 결론은 살아야 한다 였다. 어떤 일이 닥쳐도 일단 살아야 한다.


지금 내가 살아서 글을 쓰게 된 경위는 이렇다. 새벽에 열을 재니 38도였다. 일단 아침에 병원에 간다고 직장에 신고를 하고 시간에 맞춰 한국인 의사가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진료 결과 식중독. 링거를 맞고 지사제, 정장제, 진통제 등등 약을 배부르게 먹고 나니 열이 내리고 상태가 좀 나아졌다. 열이 내리고 나니 출근하는 발걸음에 자신감이 생겼다. 열을 잴 테면 재봐라.


여전히 배가 아프다. 계속 죽을 먹으며 약을 복용하고 있으니 내일은 또 나아지겠지. 혼자 사는 역기러기 가장은 건강해야 한다. 물론 열이 내렸다고 앞서 떠올렸던 여러 문제들이 해결된 것은 아니다. 그래도 내가 살아서 해결해 나갈 수 있으니 다행이다. 혼자 앓았던 하룻밤, 뭔가 또, 다 소중해진 느낌이다. 건강이 최고다. 가족이 최고다. 대한민국이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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