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등지사

금준미주천인혈 옥반가효만성고 촉루락시민루락 가성고처원성고

by 멧별


금동이에 담긴 좋은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옥소반의 좋은 안주는 만 사람의 기름이라.

촛농 떨어질 때 백성들은 눈물 떨구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성 또한 높아라.


춘향전 암행어사 출도 직전 이몽룡이 지어 변학도의 생일상에 던진 시. 기름 고膏, 높을 고高를 운자로 띄운 걸로 유명하다. 권세의 틀을 유지하고 사대의 명분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던 한문, 백성들에겐 오르지 못 할 사다리 같았던 그 문자에 담아낸 그들의 마음. 붓을 놀린 이몽룡의 그 마음 진심이고 변함 없기를.


금등지사. 영원한 제국,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등 정조 이야기에 단골로 등장하는 말이다. 영조가 '올빼미야 올빼미야'로 시작하는 시 ‘치효’를 읊고, 아들 사도세자의 죽음에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이 적힌 서책. 결국 그 죽음의 원인이 노론 정파에 있다는 사실을 손자 정조에게 전하려 했다는 것이다. 원인이 노론이든 뭐든 아들을 몰아붙여 정신이 병들게한 아버지의 후회일 개연성이 있다. 어쨌든.


영원한 제국에서 심환지로 대표되는 노론 벽파 일당은 본인들의 근간이 흔들리고 왕권이 강화될 수도 있는 이 가공할 증거물을 인멸하기 위해 피바람을 일으킨다. 장대비가 내리던 그날 밤 심환지의 협박을 견뎌가며 금등지사를 기다리던 정조. 그러나, 일편단심 충신 이인몽은 끝내 등금지사와 함께 칼에 베어져 쓰러지고, 얼마 후 정조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영원한 제국이 독자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국가에는 왕같은 절대적 집중 권력이 있어야 한다.' 인지, '권력은 집단으로 실존하고 왕이라도 그 권력에 도전하면 죽는다.' 인지 잘 모르겠다. 확실한 한가지는 권력의 쟁취와 사수를 위해서는 피가 필요하다는 사실인 것 같다. 지금도 바꾸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 사이는 아수라장이다.


아쉽게도 영원한 제국에 등장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일반 백성들이다. 그들이 초근목피로 연명을 했는지, 금준미주 옥반가효와 태평성대를 누렸는지, 박주산채라도 먹고 살았는지 별 말이 없다. 귀족이면서 지주였던 자들의 권좌 바꿈이 피착취자인 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싶다가도, 그래도 나라의 지도자라는 책임감 하에 실학에 기반한 민생개혁을 꿈꿨던, 꿈이라도 꿨던 정조대왕이 나았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본다.


영원한 제국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이 밤이 지나고 이인몽이 칼을 맞고 금등지사가 박살 나면 정조는 죽고 그가 꿈꾸던 세상도 물거품이 되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노론 측 내시감 서인성은 궁지에 몰리자 급기야 왕에게 칼을 겨눈다. 이인몽을 베던 노론의 자객은 금등지사를 지키려는 그에게 "어리석구나."라고 말한다. 지키려는 자들의 수비는 집요하고 강력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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