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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새벽 Oct 22. 2024

#1-10. 주변 모든 텍스트가 공부거리


어휘를 수집하기 위해서는 주변에 존재하는 언어의 자취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탐색하는 눈이 필요하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텍스트도 허투루 넘기지 않고 예리하게 다루는 습관이 몸에 배어야 한다. 번역 일을 하며 어휘 자산의 중요성을 절감한 후로는 쓸만한 어휘가 보이면 일단 쓸어담고 보는 일종의 직업병 같은 게 생겼다. 길가 광고판이나 현수막 문구에도, 물건을 사면 딸려 오는 설명서 문구에도, 행사 안내 포스터나 소개 팸플렛에도, 라디오에서 우연히 귀를 스쳐가던 노래 가사에도 세심하게 살피면 주옥 같은 어휘들이 박혀 있다. 

     

중국에서든 한국에서든 나는 가끔 작정하고 어휘를 그러모을 때가 있다. 이를 테면 ‘물건 구매’가 아닌 ‘어휘 조사’를 목적으로 마트에 가는 식이다. 간혹 일상에서 자주 쓰는 물건인데 정작 정확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갸우뚱할 때가 있지 않은가. 어떤 날은 화장품 코너를, 어떤 날은 잡화 코너를, 어떤 날은 신선제품 코너를 돌며 익숙하지 않은 물건, 평소 쓰면서도 이름을 확실히 몰랐던 물건, 새로 출시된 물건들의 명칭을 휴대폰 메모장에 하나하나 입력해두고, 필요하면 사진 이미지도 남겨둔다.   

   

또 간혹 집에 있는 각종 서비스 계약서와 이용 약관들을 꺼내놓고 단어들을 파헤쳐보기도 한다. 한번은 카드 이용 약관에 등장하는 ‘동사’들을 쭉 살펴보다가 ‘해지’와 ‘해제’가 구분되어 사용되는 것에 호기심이 발동해 구체적인 차이를 찾아본 적도 있었다. ‘해제’는 소급성이 있는 경우 쓰이는 표현으로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일로 하는 것이고, ‘해지’는 ‘적금 해지’, ‘구독 해지’ 등과 같이 쓰여 해당 시점부터 향후 발생할 일이 무효가 되게 하는 것이다. 명확한 차이를 인지한 후로는 글을 쓰거나 번역을 할 때 두 동사를 혼동하지 않고 변별력 있게 활용할 수 있었다. ‘할부철회권’과 ‘할부항변권’도 약관에서 발견해 메모해두었던 용어다. 소비자가 카드 할부로 물품을 구입한 날로부터 7일 이내에 철회를 요청할 수 있는 권리를 ‘할부철회권’, 할부 기간 내에 모종의 이유로 인해 잔여할부금 지급을 거절할 수 있는 권리를 ‘할부항변권’이라고 지칭한다는 것도 새롭게 알았다.        


이처럼 하찮아 보이는 일상의 텍스트가 때로는 유용한 공부 자료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에게는 한낱 종이뭉치에 지나지 않겠지만 세심하고 예리한 관찰력을 지닌 자에게는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마중물이 될 수도 있다. 일상 주변에도 어휘를 건져올릴 수 있는 자료는 널려 있다. 


언젠가 중국의 보건 의약품 등록에 관한 문건을 번역할 때였다. 원문에 ‘食用(먹다, 식용하다)’이라는 동사가 계속 등장해서 적절한 한국어 표현을 고민하고 있었다. ‘의약품’을 ‘먹다’라고 처리하기엔 다소 가볍고 전문성이 떨어져 보여 더욱 궁합이 잘 맞는 전용 동사를 찾아야 했다. 그 와중에 우연히 감기약 포장지를 보다가 ‘섭취하다’, ‘투여하다’라는 동사를 딱 만났다. 어쩌다 일상에서 발견한 어휘가 그렇게 맞춤하게 잘 맞아떨어질 수 없었다. 그 뒤로 나는 물건을 사면 포장지에 기재된 문구들을 의식적으로 한번 쓱 훑어보게 된다. 언젠가 쓸모를 발휘할 원석 같은 어휘가 숨어 있지 않을까 탐색하는 마음으로.    


TV나 유튜브 등 영상 콘텐츠나 팟캐스트 같은 음성 콘텐츠들도 개인적으로 즐겨 찾는 ‘어휘 채집처’다. 다만 영상, 음성 텍스트들은 일방적으로 흘러가는 속성 때문에 뇌리에 꽂히는 어휘나 표현들이 있으면 바로 붙잡아 기록해 두어야 한다. 넋 놓고 있다가는 스치고 증발해 버려서 손 닿는 곳에 메모 수첩이나 휴대폰을 항시 준비해 둔다. 새로운 신조어, 최근 유행하는 어휘, 몰랐던 어휘, 끌리는 어휘들이 나오면 두서가 없더라도 일단 끄적거려 단서를 남겨두어야 한다. 


또한 장르마다 건질 수 있는 어휘 유형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콘텐츠도 편식 없이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것을 추천한다. 젊은 세대의 언어 세계로 다가가고 싶을 땐 웹툰이나 예능 콘텐츠를, 작품 분석 메타언어를 익히고 싶을 땐 영화평이나 서평 콘텐츠를, 최근 경제 이슈나 용어 업데이트가 필요할 땐 시사 경제 프로그램을 서성대며 오늘도 나는 우직하게 어휘들을 주워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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