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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새벽 Jun 08. 2024

#1-9. 고유 문화가 스며드는 어휘


우리는 사진을 찍을 때 초점화할 피사체를 뷰파인더 테두리 안에 배치하고 화면 구도를 설정한다. 사각의 틀을 두르는 방식은 저마다 제각각이다. 이를 흔히 ‘프레이밍(framing, 틀짓기)’이라고 한다. 미디어 분야에서는 동일한 사안이나 현상에 대해 인지주체가 각자의 직관적 틀에 따라 관찰하고 규정하는 행위를 일컫기도 한다. 어찌 보면 특정 현상이나 대상을 언어 기호로 명명하는 것도 일종의 ‘프레이밍’을 거친다. 이름을 부여하는 주체가 언어에 강조하여 담고 싶은 면을 부각시킬 가능성이 높다.     


언어는 단순한 기호가 아니다. 언어화 과정에 사용자의 사고방식과 문화가 깃든다. 번역을 하다보면 동일한 개념이나 현상을 두고 문화권마다 언어 기호로 프레이밍하는 관점이 다른 경우도 있고, 출발어 문화권에서 사용된 프레임이 정작 도착어 문화권에는 부재한 경우도 있다. 대상의 어느 일면에 초점을 맞추는지, 대상에 어떤 언어 프레임을 씌우는지는 그 문화권 내 구성원들의 인지 체계, 사유 방식과 직결된다.    




만년필은 영어로 ‘Fountain pen’이라고 불린다. 잉크저장 용기가 내장되어 있어서 잉크가 마르지 않고 계속 솟아나는 펜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런데 이 펜이 한국에 처음 소개되었을 당시에는 먹물을 찍어쓰던 붓에 비해 오랫동안 쓸수 있다는 ‘사용시간의 지속성’에 주목해 ‘만년필(萬年筆)’로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이 ‘만년필’을 중국에서는 ‘강철 펜’이라는 의미를 담아 ‘钢笔’라고 한다. 만년필 펜촉의 ‘금속성’ 재질을 전경화한 명명이다. 하나의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문화권마다 다름을 알 수 있다.       


또한 한국어의 ‘모 아니면 도’는 한국의 전통 윷놀이에서 윷 4개를 던져서 나온 극과 극의 결과를 대비적으로 활용한 표현이다. 선택의 결과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지만 긍정적인 기대를 걸고 과감하게 결정을 내리는 상황에 쓴다. 한국 전통 놀이에 착안한 만큼 다른 문화권에서는 생경할 수 밖에 없다. 이처럼 문화 특수성이 강하게 스며든 어휘나 표현들은 타 언어로 옮길 때 현지 사용자들이 과연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을지를 타진해 봐야 한다.       




어떤 특징을 언어로 표상할 때 특정 인물 캐릭터를 콕 집어 상징적으로 내세우는 표현들도 있다. 한국인들은 ‘그 사람 놀부 심보다’라는 말을 들으면 마음 씀씀이가 심술궂고 고약하겠거니 알아차린다. <흥부전>이라는 전래동화에 나오는 ‘놀부’의 이야기를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자주 접하다보니 ‘놀부’가 ‘욕심 많고 심술궂은 인격’의 대명사임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또 다른 사례로 중국에서는 누군가의 야심이나 속셈이 뻔히 드러날 때 <삼국지>에 등장하는 ‘사마소(司馬昭)’를 소환한다. ‘司马昭之心, 路人皆知’는 그대로 풀자면 ‘사마소의 마음은 지나가는 행인들도 다 안다’는 의미로, 위(魏)나라 조모(曹髦) 재위시기에 대장군이었던 사마소가 권력을 독점하고 제위를 탈취하려는 야욕을 명백하게 드러냈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적나라하게 보여지는 야심을 묘사할 때 중국인들이 흔히 활용하는 표현이다. 다만 한국어의 ‘놀부 심보’든, 중국어의 ‘사마소 마음’이든 해당 문화권에서는 익숙해서 너무 당연하게 쓰이지만 캐릭터에 대한 정보가 부재한 타 문화권에 그대로 밀어넣을 경우 현지 독자들이 감당해야할 인지적 부담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각 문화의 고유성이 깊이 스며든 어휘들은 글을 옮기는 입장에서 늘 어려운 숙제다. 번역 과정에서 이러한 요소들을 능숙하게 다루려면 어휘 내면에 켜켜이 새겨진 문화 배경까지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 언어에 투사된 문화 차이를 인식하고 문화적 공감대 부재 시 대체 가능한 대응 표현들을 꾸준히 챙겨두어야 기존 틀의 초점을 옮기든 아예 새로운 틀로 교체하든 보다 적극적이고 정확한 중재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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