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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어휘 수집이 일상이어야 하는 이유

by 푸른새벽 Jan 1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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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 환경, 문화, 사용자 등 여러 변수를 만나 다채롭게 변주되는 어휘의 속성을 간파했다면 이제 번역가가 할 일은 어휘 장악력을 높이고 글센스를 연마하는 것이다. 번역을 하다보면 내 모국어에 결핍과 허기를 느끼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그러니 글을 다루는 한, 어휘 공부는 늘 ‘ON’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자신만의 언어 데이터를 우직하게 모아 놓아야 한다.      


‘언어’ 자산이 중요한 직업이다 보니 언어로 발현되는 모든 것들을 눈여겨 본다. 책을 읽든 영상을 보든 전시회를 가든 나는 온전한 수신자의 입장에 머무르지 못한다. 의식적으로 표현을 관찰하고 뜯어본다. 여기서 이 어휘가 왜 사용되었는지, 챙겨두면 써먹을 수 있을지 언어의 현재 쓰임새와 향후의 쓸모를 가늠하게 된다. 그렇게 꽂힌 표현들은 메모를 하거나 사진을 찍어서 일단 붙잡아둔다. 그렇지 않으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거나 휘발되어 버린다. 뒤늦게 ‘그때 그 표현’, ‘어디선가 봤던 그 표현’을 떠올리려 기억을 뒤져도 이미 사라지고 없을 때가 태반이다. 그래서 일단 발견하고 꽃힐 때마다 차곡차곡 적립해둔다.     


@ 뮤지엄산, 우고 론디노네 ‘BURN TO SHINE’@ 뮤지엄산, 우고 론디노네 ‘BURN TO SHINE’




번역가에게 어휘 수집이 지속되어야 하는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어휘력 커버리지 확장을 위해서다. 번역가는 매번 작업하는 장르나 주제가 다르기 때문에 평소 다방면의 어휘, 용어, 표현들을 익혀두어야 한다. 익숙한 반경에 안주하지 않고 낯선 영역으로 계속 뻗어가면서 새로운 어휘들과 조우하는 경험이 필요하다. 어휘 그물을 넓게 펼쳐놓고 언제 어디서든 어떤 분야에서든 건져 올릴 준비를 해야 한다.


나는 서점에 가면 주로 문학, 에세이, 문화, 언어 섹션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다. 그런데 간혹 내 일상과 연계점이 전혀 없어 보이는 낯선 분야 쪽을 일부러 찾아가려고 한다. 지식이 미천해 내용을 이해하기는 어렵겠지만 최근 그 분야에서 자주 쓰는 용어 몇 가지라도 건지기 위함이다. 깊이 들어갈 것 없이 매대 위 베스트셀러나 신간 목차만 빠르게 훑어봐도 눈에 들어오는 어휘들이 있다. 그런 어휘들을 휴대폰 메모장에 일단 기록해 두고 가능하면 바로 의미를 찾아본다. 고작 용어 몇 개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런 조각들이 쌓이면서 이질적이었던 세계와 조금씩 거리를 좁혀갈 수 있다.   

  

둘째, 어휘 돌려쓰기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번역가의 어휘 자원이 빈곤하면 활용 가능한 대응어가 한정적이지만, 어휘 자원이 풍부하면 하나의 단어에도 여러 개의 대응어 말풍선이 떠올라 그때 그때 골라 쓸수 있다.


가령 ‘說(말하다)’라는 동사가 텍스트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고 치자. 있는 그대로 ‘말하다’라고 옮길 수도 있겠으나 같은 어휘가 계속 되풀이되면 자칫 단조롭고 지루해질 수 있다. 대화 맥락과 어조에 따라 ‘입을 떼다’, ‘운을 떼다’, ‘이르다’, ‘설명하다’, ‘타박하다’, ‘툴툴대다’, ‘대꾸하다’, ‘말을 붙이다’, ‘나무라다’, ‘의견을 내다’ 등으로 적절하게 변화를 준다면 글맛이 더 좋아진다.  어휘의 변주는 온전히 번역가의 어휘 구사력에 달려 있다. 동일한 어휘에 대해 매 순간 똑같은 번역어를 획일적으로 적용하는 식상함을 탈피하고 싶다면 평소 언어 재료를 많이 확보해두는 것이 상책이다.      


셋째, 어휘력 틈새를 메우기 위함이다. 어휘는 계속 확장되고 파생되며 신생한다.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면 어휘력에 듬성듬성 구멍이 생기기 마련이다. 새롭게 등장한 신조어나 타언어권에서 새롭게 도입된 개념어와 같이 기존 내 언어 데이터에 존재하지 않았던 어휘 요소들은 적극 수용해야 한다. 어휘가 새롭고 생소하더라도 ‘낯 가리기’나 ‘거리 두기’ 하지 말자.


남편이 주재원으로 파견되어 중국에 머무를 때였다. 나는 이미 한국에서 전공도 했고 관련 일도 하는 터라 중국어에 익숙한 상태였지만 남편이나 딸아이는 현지에서 부딪히며 중국어를 배웠다. 그런데 남편이 회사 일선에서 터득한 현장 중국어 어휘나 딸아이가 학교에서 또래 중국 친구들에게 배웠다는 신세대 중국어 어휘들 중에는 나의 데이터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수두룩했다. 교과서나 뉴스를 통해 배운 나의 중국어는 정형화되어 딱딱했고, 정작 일상과의 밀착도는 부족했던 것이다. 중국어는 자신있다고 자부했으나 우리가 평소 대화할 때 국어책에 나오는 문장처럼 완벽하고 정제된 한국어만 구사하지 않듯이 현지에서 들려오는 중국어는 그야말로 ‘날 것’ 그대로였고, 생소한 어휘들이 귓가에서 닿았다가 튕겨나갔다. 그때 깨달았다. 어휘 공부에 마침표를 찍을 수 없다는 걸.      




이렇듯 번역가에게 어휘는 꾸준히 수혈하고, 장전해야 하는 자산이다. 기존에 알고 있는 어휘들로 대충 떼우자는 마인드는 버리는 게 좋다. 내게 취약한 어휘, 생경한 어휘들을 끊임없이 채워넣으면서 자칫 방심하면 성글어지기 쉬운 내 어휘력의 틈새를 촘촘하게 메워나가는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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