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먹함 없애기-> 보고 또 보기-> 끝까지 매달리기
외국어 텍스트를 독해하는 것과 다른 언어로 옮겨서 전달하는 것은 그 목적과 무게 자체가 다르다. 독서를 위한 텍스트 읽기는 머리 속에 이미지를 떠올리며 내 선에서 이해하고 흡수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번역을 위한 텍스트 읽기는 완벽한 이해를 거쳐 다른 언어로 재구성하는 단계까지 뻗어나갈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머리 속에 그려지는 형상을 어떻게 언어화해서 풀어놓을지, 어떤 어휘를 골라 내놓을지... 끊임없이 어휘 퍼즐을 맞추는 과정이다. 사소한 어휘 하나에 뭐 그리 매달리냐고 할 수 있겠지만 번역을 제대로 하려면 어휘 사용에 대범해져서는 안 된다. 까다롭게 따지고 고심해서 결정해야 한다.
번역의 품질은 결국 적절한 어휘들을 얼마나 잘 꿰었는지 여부와 직결된다. 어휘 하나 고르면서 희비가 교차하는 일도 빈번하다. 맞춤한 어휘를 발견한 순간에는 보물을 찾은 듯한 희열을 느끼고, 의미나 이미지만 둥둥 떠다닐 뿐 글로 내뱉어지지 않는 순간에는 세상 답답하고 애가 탄다. 번역을 하면 할수록 어휘력이 간절하고 소중해지는 이유다. 그래서 나는 번역어를 찾는 과정에서 꼭 실천하려고 하는 세 가지 리추얼이 있다.
첫째, 어휘 예열 작업을 한다. 번역에 착수하기에 앞서 의뢰 주제와 장르에서 상용되는 어휘들을 찾아보면서 텍스트의 맥락과 분위기로 진입하기 위한 워밍업을 하는 것이다. 이를 테면 중국 소설을 번역하는 중이라면 비슷한 시기, 비슷한 주제로 쓰여진 한국 소설을 찾아 읽으면서 그 시대의 어휘와 문체에 미리 발을 담가본다.
인력거꾼 쌍쯔의 삶을 통해 1920년대 하층민들의 참상을 그려낸 라오서의 대표작 <낙타상자>를 번역한다고 치자. 가난한 인력거꾼 김첨지의 하루를 다룬 현진건의 단편소설 <운수 좋은 날>을 참고하며 시대상에 적합한 어휘 표현들을 눈에 익힌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도자기 관련 번역을 의뢰 받을 때는 도자기 유형이나 제작방법, 부위별 명칭 등 기본적인 용어들을 익혀두고, 유사한 장르의 도예 관련 자료들을 찾아 빠르게 훑어본다. 이렇게 잠시라도 ‘미리보기’ 시간을 가지면 ‘모드 변환’이 한결 수월하고 여세를 몰아 번역에 빠르게 몰입할 수 있다.
둘째, 어휘의 정확한 의미를 꼭 확인하고 넘어간다. 100% 확실히 알고 있다는 맹신은 금물이다.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자는 심정으로 알고 있는 어휘도 꼭 사전을 찾아본다. 개념 정의를 재확인하려는 의도이기도 하고, 다의어라면 어떤 의미들이 내포되어 있는지 다시 한번 헤아려보기 위함이다. 간혹 너무 익숙해서 사전의 도움 따위는 필요없다고 생각했던 어휘들이 의외의 뜻을 품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아차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의 성급한 지레짐작을 다시금 반성하며 겸허한 자세가 된다.
한국어 형용사 중 ‘칠칠하다’는 더없이 긍정적인 속뜻을 품고 있지만 종종 부정적으로 오용되는 단어다. ‘못하다’, ‘않다’는 부정의 형태로 자주 쓰여서 혼동하는 건지, 직관적으로 들려오는 음성이 그다지 밝아보이지 않아서 오해를 사는 건지 원래의 의미를 극단으로 뒤집어 버리는 웃픈 실수들이 간혹 눈에 띈다. 언젠가 누군가 “제 칠칠한 모습을 보완해줄 수 있는 사람이 이상형”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보완’이라는 동사를 선택한 것으로 보아 모자라거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기를 바란다는 뜻일텐데 ‘칠칠한 모습’은 이미 훌륭한 상태가 아니던가?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못할 땐 바로 국어사전을 열어 확인해보는 게 상책. ‘칠칠하다’는 역시 ‘성격이나 일처리가 반듯하고 야무지다’는 의미였다. 단정하지 못하거나 야무지지 못한 경우 ‘칠칠하지 못하다’라고 해야하는데, 앞서 말한 화자는 이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한 듯 하다.
번역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의미를 오인하는 실수를 한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번역가의 언어가 엇나가면 독자를 오도할 수도 있다. 그러니 익숙하다고 데면데면해서는 안 될 일이다.
셋째, 때로는 끈질기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번역을 하다보면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 형상은 떠오르나 막상 ‘활자’로 꺼내려니 쉽지 않은 어휘들을 간혹 만난다. 익숙하지 않은 분야의 생소한 용어라서, 평소 자주 쓰는 어휘가 아니라서, 출발어에는 존재하지만 도착어에는 마땅한 표현이 존재하지 않아서 등 이유는 여러 가지다. 하지만 그렇다고 외면할 수는 없다. 어떻게든 글로 뽑아내야 하는 것이 번역가의 숙명적 과제니까.
원문의 첫 번째 독자인 번역가가 어휘의 실체에 다가서지 못한 채 두리뭉실하게 표현하면 번역문을 읽는 독자들은 더더욱 오리무중일 거다. 그러다 보니 들어맞는 번역어가 바로 딸려나오지 않는 어휘들을 마주하면 그냥 건너뛰지 못하고 한참 주변을 맴돌게 된다. 단어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어떻게든 적절한 대안어를 찾기 위해 집요하게 파고든다.
한번은 중국의 ‘크락자기(Kraak ware, 그릇 중앙에 원형의 중심 문양을 배치하고, 주변에 구획을 나눠 그림을 새긴 청화백자)’에 관한 글을 번역할 일이 있었다. 디자인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开光’이라는 낯선 단어가 등장했다. 사전을 찾아보니 '점안식(혹은 개안식)', 즉 불교에서 불상을 만들거나 불화를 그릴 때 눈동자를 그리는 의식이라고 되어 있었다. 사전적 의미는 그러하지만 도자기와 연관시키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어보였다.
이처럼 사전에서 실마리를 찾지 못할 때 번역가는 맥락에 부합하는 새로운 표현법을 직접 찾아나서야 한다. 사전이 어휘가 사용되는 모든 경우의 수를 다 알려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크락자기와 ‘开光’을 동시에 입력하며 중국어 자료들을 뒤진 결과, ‘접시 표면에 방사형으로 일정하게 구획해 칸 안에 그림을 그려놓은 것’들을 ‘开光’이라고 지칭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의미의 단서를 찾고 나니 이제 어떤 한국어로 대체해야 할지 고민할 차례였다. ‘구획을 나누어 칸마다 그림을 그려넣어 장식했다’고 풀어쓰기해도 되겠지만 가능하면 딱 떨어지는 명사를 찾아 깔끔하게 대체하고 싶었다. 결국 크락자기에 관한 박물관 자료와 논문들을 파고 들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검색하다가 ‘그림창’이라는 용어가 눈에 들어왔고, 비로소 “구획을 나눠 그림창을 배치했다”라는 단축된 표현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최근 번역 현장 곳곳에는 기계번역이 꽤 깊숙히 들어와 있다. 그러나 기계는 맥락을 따져가며 어휘를 공들여 고르거나 문장을 재단하지 않는다. 창의적 사고의 과정 없이 데이터나 확률에 기대어 거칠게 툭툭 토해낼 뿐이다. 이러한 기계번역과 차별화된 결과물을 내놓기 위해서는 어휘 하나하나에 진심이어야 한다. 번역가가 어휘를 확실히 장악하지 못한 채 설익은 표현을 던져 놓으면 독자들도 맥을 짚지 못한다. 그러니 익숙한 어휘일지라도 기억의 관성에 매몰되지 말고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또한 낯선 어휘라면 인내심을 가지고 진득하게 탐색하며 합당한 용어를 도출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