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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트쿠키 Oct 23. 2024

몸에게 사죄하는 시간

우리는 모두가 운디드힐러이다. 



"나이를 먹으니 소개팅도 줄어드네"

"눈가의 주름 때문에 웃을 수가 없다"

"최근 아이돌 중 모두를 기억할 수 있는 건 세븐틴"

"내 담당의가 나와 동갑이야"



"비가 오니 정말 몸이 찌뿌둥하고 손목이 시큰거려"

내가 나이를 빼먹지 않고 제때 잘 먹고 있구나 느끼는 순간은 기회의 감소, 피부의 노화, 기억력 감퇴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 제일은 몸이다.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먼저 느낄 수 있다. 30대부터 쌓아온 건강 관리는 마흔의 기초가 되는 것 같다. 기초가 탄탄하지 않으면 생활습관, 성향 등에 따라 어쩌면 시간에 비례하여 몸이 더 시간을 먹을 수도 있다. 내가 그러했다. 




 



어느 날부터 갑자기 찾아온 증상


어느 날, 이유도 알 수 없이 왼손이 아팠다. 지난 5월부터 시험을 준비하고 있던 터라 연초보다 무리해서 일과 공부를 한 탓에 염증이 올라왔구나 싶어서 정형외과에서 염증주사를 맞고 처방을 받았다. 사실 사회생활을 하면서부터 어느덧 몸의 염증은 뗄 수 없는 친구가 되어 있었다. 행사를 무사히 마친 날, 기관장에게 보고를 완료한 날 등 스스로 만족할 정도로 일을 완벽히 끝낸 그다음 날에는 어김없이 급성편도염이나 위염이 찾아왔다. 직장인들은 누구나 달고 사는 '염' 하나는 있으니까 증상이 발현할 때 적당히 다스리고 넘어갔다. 


뭐든 적당히 하면 문제가 된다. 재작년부터 잠을 좀 못 자거나 스트레스를 받거나 하면 한 두 차례 손가락 또는 발가락 한쪽이 부었다. 그때마다 정형외과나 통증의학과를 가며 주사와 약처방으로 하루 다스리면 잘 넘어갔다. 통증과 붓기의 주기가 짧아지고 있었음에도 나는 눈치를 못 채고 하루 잘 다스리는 거에 의미를 가졌다. 어느덧 몸은 주인이 말을 안 듣는 게 못마땅했는지 크게 반응했다. 


보통날 같으면 하루 주사 맞고 3일 약 먹으면 붓기와 통증이 사라졌는데, 3주째 매주 염증주사를 맞아도 스테로이드 약까지 먹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치료받은 당일에만 반짝 효과를 보일 뿐 그다음 날부터 붓기와 통증은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이것을 몇 번 반복하자 어느덧 나는 주먹을 쥐지도 펴지도, 물건을 들지도 못할 정도로 악화됐다. 그러다 몸이 제발 알아차리라고 아우성치는 일이 벌어졌다. 큰 병원을 예약하고 검사받기 2일 전에 갑자기 손바닥부터 왼쪽 팔 전체, 알 수 없는 끊어질 듯한 통증으로 새벽 2시에 깨서는 잠을 못 잤다. 울면서 손을 전처럼 온전하게 못써도 되니 이 통증만은 가시게 해달라고 듣는 이 없는 허공에 빌고 또 빌었다. 처방받은 약을 3시간 간격으로 씹어먹으며 겨우 아침에 잠들었다. 살면서 이런 고통은 처음이었다. 


내가 찾아간 곳은 류마티스 내과. 다니던 동네 통증의학과 선생님이 이런 붓는 증상이 5회 이상되면 류마티스 내과에 가보라고 한 것이 떠올랐다. 담당의사를 만날 때까지 손의 통증은 다행히 줄어들었지만 손등이 손바닥 장난감처럼 퉁퉁 부어 있었다. 피검사와 MRI 등을 검사해 본 결과 내 증상의 이름은 혈청 음성 류마티스. 병명이 아닌 증상이라고 말한 이유는 보통 검사 결과에 류마티스 인자가 양성으로 나타나서 판정되는 경우가 많지만, 나의 경우에는 인자가 없지만 여러 증상과 검사 결과를 보고 종합적으로 최종 판단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공격하는 병


퇴행성 관절염과는 다르게 류마티스는 몸의 노화 과정에 의해 발병하는 것이 아닌 면역세포에 의해 염증이 발생한다. 세균이나 바이러스로부터 내 몸을 지켜야 할 면역세포가 자신의 몸을 공격해서 염증을 발생시키고 면역체계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면역세포들이 몸의 어느 부위를 공격하느냐에 따라 증상과 질병이 나타난다. 내가 품고 있는 면역체계가 나를 지키는 것이 아닌 반대로 나를 공격하다니, 이 얼마나 괴상한 병이란 말인가.


아직 정확한 원인도 밝혀지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은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이라는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 주실 뿐이었다. 평소에 괜찮다가도 심한 스트레스를 겪은 후에 발병될 수도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역시나 현대인의 모든 질병의 근본 원인인 스트레스가 빠지면 섭섭하지 싶었다. 명확한 치료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증상에 따라 통증과 염증을 가라앉혀야 하고, 완전 초기니까 고혈압과 고지혈증처럼 꾸준히 관리하면 변화는 없을 거라고 말씀해 주셨다. 제때 관리하지 않으면 관절의 변형이나 다른 합병증이 발생할 수 있다는 말도 덧붙여주셨다. 친절하지는 않지만 딱 할 말만 하시는 선생님이신데 이때만큼은 굳이 바라지 않은 친절을 괜히 베푸신다 생각했다.


3개월 후 재검사를 위한 예약을 하고 3개월치 약을 한 봉지 가득 차게 받아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멀게 느껴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류마티스 내과를 찾아가고 검사했지만, 마음 한켠에는 손목터널 증후군이나 손목 염증이 남들보다 유독 심해서 그런거기를 바라고 바랬는지도 모른다. 한편, 내가 나를 공격하는 병이라니 어쩜 내 성격과도 같은 질병을 만난 것인가 씁쓸한 웃음이 일었다. 






 

그래도 오른손이 아닌 게 다행이야


선천적으로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는 아니여서인지 몸이 아프면 마음도 많이 아파진다. 병원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어떻게든 잘 관리해야지!라는 다짐은 약을 먹고 침대에 눕는 순간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왜 지금인가 등의 생각으로 바뀌어 약기운과 함께 퍼져나갔다. 이 시기에 행정사 2차 논술시험을 준비 중이었는데, 시험이고 뭐고 왼손이 미세하게 아린 만큼 마음도 아려왔다. 나는 분명 약을 먹고 침대에 바르게 누워있는데, 왜 내 마음은 푹 꺼져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일주일이 지나도록 논술 책을 보고 싶을 때만 보고, 하기 싫을 때는 좋아하는 영상을 보며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시간을 흘려보냈다.   


매일 반복되는 나날 속에서 눈을 뜬 아침에 문득 나는 여느 때와 달랐다. 병원 다녀온 뒤로부터는 아침에 잠에서 깨면 침대에 누운 채로 어린아이가 된 것 마냥 잼잼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아침마다 관절이 뻣뻣해지는 조조 강직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다. 왼손 주먹을 쥘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며 이내 마음은 다시 침대 속으로 푹 꺼졌다. 근데 이 날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나의 몸에게 인사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양손을 오므렸다. 


한번 오므리며 '잠에서 서서히 깨 보자'

두 번째 오므리며 '나는 지난밤 푹 잔 것일까' 

세 번째 오므리며 '잠을 많이 못자서인지 오른손도 조금 뻣뻣하네'

네 번째 오므리며 '아직 아침에도 왼손은 주먹이 안되네'

다섯 번째 오므리며 '오른손은 서서히 깨는 거 같아' 

   

그렇게 대략 열 번을 하며 혼잣말과 생각의 그 어느쯤에 있는 말들을 나에게 했다. 그 뒤로부터 아침에 하는 잼잼은 단순히 조조강직을 확인하는 행위가 아닌 오늘은 나의 몸이 어떤지 안부를 묻는 행위로 바뀌었다. 그러면서 생각은 왼손이 지금 아프다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점점 "그래도 오른손이 아닌 게 다행이다"로 이동했다. 오른손잡이인데 오른손이 아팠다면 밥 먹는 것도, 옷 입는 것도 더 힘들었을 테고, 어쩌면 준비 중인 시험을 포기해야 했을 수도 있다. 왼손이 아파서 생활이 조금 불편할 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아침에 하는 몸의 인사 덕분에, 생각의 변화 덕분에 나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아서 시험을 준비했고 끝까지 완주할 수 있었다. 

 




환자가 아닌 운디드 힐러


운디드 힐러(Wounded healer)는 우리말로 상처 입은 치유자를 의미한다. "모든 치유자는 상처 입은 사람이다"라고 칼 융은 말했다. 자신이 진정으로 겪어본 상황, 그로 인하여 깊은 아픔을 느껴본 사람이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며 진정한 치유자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트라우마를 겪은 후 그것에 사로 잡혀 있는 사람이 아닌 트라우마 그 자체를 성장 동력으로 사용하는 사람만이 나아갈 수 있는 길이다. 


운디드 힐러는 여러 직업군으로도 존재하지만 어쩌면 개개인 모두가 운디드 힐러가 아닐까. 나와 같은 몸의 병은 물론 마음의 병까지 저마다의 고통과 아픔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치유이다.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바라보고 스스로 치유를 위한 어떤 행동들을 하는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나 또한 내일 모레 마흔이 되는 시점, 마흔의 동력이자 기초인 몸을 살펴보라는 신호 덕분에 자기 치유의 힘을 길러보려 부단히 노력 중이다. 아침에 잼잼 10번과 함께 몸에게 안부를 묻고, 평생 싫어했던 달리기를 하루 30분씩 연습한다. 블로그, 브런치, 스타벅스 다이어리 곳곳에 나의 몸과 마음의 상태를 글로 묻고 기록으로 답한다. 지난날 각종 염증으로 나의 상태를 드러냈던 몸에게 사죄하며 말이다. 여전히 자기 치유, 내면의 힘을 쌓아간다는 건 힘들다. 아주 조금씩 어제보다 오늘 더 치유되기를 바라며 계속할 일들을 해낼 뿐이다. 이러한 기록들이 쌓여 마흔을 맞이할 때쯤 나는 나 스스로에게 또는 누군가에게 운디드힐러가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품어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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