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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트쿠키 Oct 26. 2024

사랑을 맞이하는 자세

미혼에게 결혼이란


"결혼은 언제 할 거니"

"좋은 사람을 만나면 할 거예요"


나는 결혼을 '못'하는 것일까, '안'하는 것일까.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기억을 더듬어보면 가정의 따뜻함보다는 차가움이 먼저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중학교 때부터 결혼에 대해 누군가 묻는다면 비혼주의자라고 했다. 사춘기 시절부터 나는 내 삶을 스스로 따뜻하게 보살피겠다고 다짐했다. 지금은 그 시절과 다른 환경으로 어느 보통의 집과 다름없는 정도의 화목함이 있음에도 결혼에 대한 단상은 아직 청소년기에 멈춰있다. 


대학교 때 처음 만난 남자친구는 홍조가 가시지 않은 풋풋함이 서린 얼굴로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그는 우리 둘의 미래를 그려나갔다면, 나는 사회생활 속에서 빛나기 위한 나의 미래를 그려나갔다. 꼭 이러한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내재되어 있는 결혼에 대한 가치관이 다른 두 사람의 결말이 좋을 리는 없다. 사랑과 결혼에 대한 단상이 청소년기에서 더 자라지 못한 탓에 이후의 만남에서도 결혼이야기가 나오면 마음을 움츠렸다. 



30대 후반, 주변에 결혼을 안 한 사람보다는 한 사람이 더 많은 시기 

카톡방의 대화 주제가 연애보다는 생활에 초점이 맞춰지는 시기 



어느덧 시간이 흘러 마흔을 앞둔 상황. 맙소사. 어렸을 적부터 숙제는 늘 벼락치기였는데 인생의 발달숙제마저 벼락치기를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결혼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생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초조함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결혼을 해야 하나'라는 불안감보다는 결핍의 시선에 의해서다. 나 혼자만 또 사회구성원으로서 그 발달과정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그 보편적인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불안함이다. 


결혼은 선택이라고 당당히 외치면서도 사회 테두리 안에서 단단히 형성된 결혼의 관념을 이기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나는 둘이 되고 싶으면서도 속절없이 흘러간 시간 앞에 당당함이라도 유지하기 위해 선택이라 외치는 것일까.    









혼자일 것인가, 둘이 될 것인가


결혼을 한다고 과연 결핍이 해소될까. 사회적 나이에 발맞춰 또래와 환경이 다르다는 불안함이 조금은 나아질까. 결핍의 해소와 불안함이 줄어드는 것은 일시적일 것이다. '같이 있어도 외롭다'라는 문장이 등장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결혼 후에 오히려 삶의 역할과 과제가 쌓일 것이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다른 불안함이 발생할 것이다. 결국 환경에 따라 어느 누구나 불안함을 안고 살아간다. 


가정의 형태도 다양화되는 시대에 결혼한다, 안 한다로 '결혼'에 초첨을 맞추는 것은 점차 의미가 없어진다. 결국에는 '나는 어떻게 살아야 만족하고 행복할 것인가'로서 나를 직면하고 알아야 한다. 마흔에 우리는 결혼(생활)을 포함하여 나를 직면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다. 




혼자일 것인가, 둘이 될 것인가

사실 나도 모른다. 내 인연이라고 생각할만한 좋은 사람을 만나 연애 끝에 그 길이 결혼으로 닿는다면 가정을 이룰 것이다. 하지만 결혼은 선택이라는 입장은 여전하다.


한편, 나와 닮은 아이를 낳고 싶다는 열망이 높으면 결혼을 위해 노력하고 준비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이때만큼은 아이와 엄마를 위한 생물학적 나이를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생각한 경우에는 결혼은 다른 의미가 될 수 있다. 나는 친구들의 아이와도 잘 어울리고 요즘은 조카와 노는 것에 푹 빠질 만큼 아이를 좋아한다. 하지만 아이가 좋더라도 아이를 낳고 기르기 위한 목적으로 결혼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한 아이를 책임질 수 있는 생물학적 나이를 훌쩍 지나서 누군가를 만난다면 나에게 결혼의 형태는 다른 의미가 될 것이다.





내가 품은 세계를 넓히면서 맞이하려 한다. 


"혼자 있을 때 행복해야 둘이 있을 때 더 행복하다"라는 말은 늘 강조된다. 자신의 행복이 꼭 둘이어야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내 행복을 주도하는 자세는 삶과 사랑 그 어느 영역에서든 중요하다. 지금의 시기에 이제는 결혼에 대한 결핍, 불안, 부재에 대한 생각의 방향을 삶의 방식과 행복요소로 돌리는데 집중하려 한다. 이렇게 마음먹어도 간혹 사회적 제도와 여러 시선들에 의해 나도 모르게 움츠려 들 때가 있을 것이다. 나의 어릴 적 시절처럼. 움츠려 들 때면 앞으로는 다음의 좋아하는 문장을 소리 내어 말하고 말할 것이다. 내가 품은 세계를 넓히며 사랑을 맞이할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은
세계와 세계가 만나는 일
그래서 나는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의 세계가 넓길 바란다. 
내가 들여다볼 곳이
많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나눌 수 있는 것들이
많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가끔은 세계가
전혀 없는 사람도 있더라.
그러니 상대의 입장에서 내가 품은 세계는
면적이 얼마나 되는지도 한 번쯤 생각을 해봐야 한다. 

- 이석원, 언제 들어도 좋은 말




그 시절의 추억 하나


사람이 변하는 걸까, 마음이 변하는 걸까, 사랑이 변하는 걸까. 결국은 다 같은 말인가.

마냥 설레는 시기에는 본인이 기존에 가지고 있는 에너지의 몇 배를 사용하며 상대방에게 마음을 보여주려 한다. 주변에서는 그런 그의 말투, 스타일, 행동 등을 보고 사람이 변했다고 말했을 거다. 

서로를 알아가며 포용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 짓는 시기에는 못 보던 모습을 보기 시작한다. 기존 본성과는 다른 그간 보여준 모습이 노력임을 깨달으며 고마움과 실망감 그리고 서운함이 매일 매 순간 교차한다. 서운함을 말하며 다시 노력해 보자 했던 그 다짐은 재로 남는다. 처음에 설렘으로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 변했던 사람은 결국 변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 그러면서 내 마음과 상대방의 마음은 전과 같지 않게 된다. 마냥 달콤함을 맛보던 시간이 끝났으니까. 

서로가 꼭 지켜줬으면 좋겠다고 한 약속들이 하나, 둘씩 깨지는 시기에는 내가 알던 상대방의 모습도 깨진다. 날 생각하는 상대방의 마음 또한 깨지는 모습을 보며 그간 만났던 관성에 의해 아닐 거라고 외면하는 내 모습이 안쓰러워진다. 관계 속에서 행복함이 아닌 다른 모습만 들여다보는 순간, 내 사랑은 변하기 시작한다. 

이 사람이 마지막일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었었다. 이 사람과는 처음으로 결혼을 꿈꿨었다. 이 사람과의 미래는 행복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들었었다. 처음 들었던 마음들이어서 애틋하게 감싸 안았고 할 수 있는 한 더 노력하려 했고 놓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놓아줘야 할 때가 온 것 같았고 결국 난 붙잡던 손을 내려놓았다. 그 어떤 희망회로를 돌려봐도 그가 보여준 행동은 나에게 그 정도만 좋아했던 거고 나도 그 이상의 노력은 어려운 딱 그 정또가지만 마음을 썼던 거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그 정도였던 거다. 

많이 애도하고 슬퍼하며 시간에 흘러 보내줘야지. 그래야 새로운 사랑이 왔을 때 온전히 받아들이며 온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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