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존감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MBC 아나운서 유튜브 채널인 '뉴스안하니'를 즐겨본다. 잘 알 수 없는 직업 군 중 하나인 이들의 일상과 업무, 환경들을 재미있게 담아내고 있다. 채널을 초창기부터 봤는데, 채널의 모토가 방송 외에 아나운서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획부터 편집까지 콘텐츠를 아나운서들이 자체 생산한다는 점을 알고는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들은 N잡러였다. 작사가, 피아니스트, 작가와 화가, 변호사. 이것은 직업이 아니라 아나운서의 취미 활동이자 일명 부캐활동을 일컫는다. 일상에서 틈틈이 가진 취미로 자연스럽게 또 다른 자신을 브랜딩 하는 그들이 참으로 멋졌다.
"내 전문영역이 하나 더 있으면 내 자존감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TV프로그램 유퀴즈에 게스트로 나온 작사가이자 MBC 아나운서인 김수지 아나운서에게 아나운서가 된 이후에도 왜 이렇게 열심히 작사를 했냐는 MC의 질문에 대한 답이다. 어렸을 적부터 원하는 꿈을 이뤘지만 이후 끝없이 누군가와 비교하게 되는 상황이나 다음 단계에 대한 고민은 끝없이 이어졌다고 한다. 그 속에서 무수히 흔들렸던 자존감을 세우기 위해 마음을 분산시킬 다른 길을 하나 만들게 되었다고.
취미는 보통 좋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우리는 늘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한다. 온오프라인을 구분 짓지 않고 각종 고민을 토로하는 자리에 '좋아하는 것을 모르겠어요'라는 질문은 단골이다. 위에서 언급한 아나운서처럼 자신의 취미와 취향을 턱턱 발견하고 지속하는 모습은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나 또한 나에 대해 여전히 헤매는 사람 중 하나여서 좋아하는 음식은 쉽게 말해도 취향을 찾기는 어렵다. 무취, 무채색도 그 자체로 매력 있지만 나는 나만의 것을 갖고 싶은 사람이다. 그래서 꾸준히는 아니어도 종종 시도했던 것들과 나의 공간에 자주 등장하는 것들로 취향을 찾아 헤맨다.
나는 몸치에 속하는 편인데 어렸을 적부터 이상하게 춤을 좋아했다. 고등학교 때는 남들 공부하는 동아리에 들어갈 때 치어리더 동아리에 들어가서 공연에 참여했었다. 대학교 때는 스스로 통통하다는 생각에(사실 그때가 지금보다 훨씬 날씬하다.) 치어리더나 재즈댄스 동아리에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에 영상 소모임에서 활동했는데 영상을 촬영하는 씬에서 살짝 춤을 추거나 흥얼거려야 하는 씬은 내가 담당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이따금씩 원데이 클래스나 문화센터에서 방송댄스를 배웠다. 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 1년 이상을 하지 못하고 그 순간을 즐기는 것에 만족했다.
30대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직을 준비하던 중에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오래전에 영상에서 본 벨리댄스가 생각이 났다. 미소는 아름다우면서 두 다리의 떨림은 현란하고 두 손짓은 우아했다. 지금 아니면 배우기 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에 며칠 동안 학원을 검색해서 강남역의 어느 한 벨리댄스 학원을 등록했다. 찰랑찰랑. 수업 첫 시간에 두르고 싶었던 힙스카프를 매고 왼쪽, 오른쪽 힙을 튕기며 범프 동작을 하는 거울 속의 내가 썩 마음에 들었다.
"취미가 무엇이에요?"
"벨리댄스예요"
벨리댄스를 배운다고 하면 어떻게 배우게 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이 항상 뒤따라온다. 춤에는 힙합, 무용, 코레오 그래피 등 여러 장르들이 존재하는데, 그들이 생각하는 춤이 아니어서 신선하다는 눈빛으로 말이다. 시작은 화장과 의상의 화려함 속에 예쁘게 표현되는 이미지가 인상적이 어서였다. 하지만 배우면서 알게 되었다. 자기 몸에 대해 명확하게 알고 이를 기반으로 얼굴, 상체, 하체를 각각 컨트롤해야 한다. 내가 나의 곳곳을 적절하게 통제하고 강약을 조절해야 몸에서 비로소 안무가 나온다.
처음에는 음악을 따라가기도 바쁜데 미세한 손끝 모양과 정교한 힙써클을 함께 만들라고 하니 미칠 노릇이었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거 같았다. 그렇게 저마다 따로따로 놀던 몸은 어느새 조금씩 조화를 이루었다.(원래 몸치기에 완벽한 조화는 기대할 수 없다.) 사선으로 어떻게 웨이브를 타야 내 몸이 예쁘게 보일지, 마야 동작(힙을 양 옆으로 각각 굴리는 동작)에서 상체를 중심에 두고 하체를 빼는 정도에 따라 어떤 느낌이 나는지를 알아갔다. 춤을 추는 시간만큼은 내가 나를 정면으로 지켜보는 시간이자 스스로를 컨트롤하는 유일한 시간이 되었다.
코로나와 함께 잠시 쉬다가 몇 년 만에 도봉구로 벨리댄스 학원을 옮긴 지 2년째가 되어간다. 이곳에서는 한 스텝 더 나아가 학원에서 주최하는 연말 무대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무대에 섰을 때는 그전에 일상에 찌들어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한없이 화려하고 당당한 내가 고개를 들고 관객을 바라봤다. 무대를 향한 박수에 자존감 또한 함께 고개를 들었다. 무대에 오르는 짜릿함은 아마추어 대회라는 그다음 스텝으로 이끌었다. 비록 왼손이 아파서 디테일함은 많이 부족해졌지만 천천히 나의 유일한 취미를 가꾸어 나가려 한다.
사람들마다 여행지를 기억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여행에서의 설렘과 다시 한번 가겠다는 희망을 저마다 사진이나 자석, 스노볼 등 갖가지 기념품으로 간직한다. 나에게는 그것이 엽서이다. 국내든 해외든 여행을 다니며 나도 일반적으로 자석을 수집했는데 무게와 부피가 꽤 불편하다. 동유럽 여행 중에 부다페스트 거리의 노점상에서 좋아하는 국회의사당 야경이 그려진 엽서를 만난 후부터 엽서를 수집했다. 가볍기도 하고 그 나라의 이미지를 손바닥만 한 종이 한 장에 품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엽서의 매력은 집으로 돌아와 정리할 때 더욱 빛을 발한다. 모아놓은 것을 보면 나만의 여행책 혹은 그림이 되기 때문이다.
똑같은 엽서를 몇 장 더 사기도 한다. 여행지에서 잠시 만난 친구와 헤어질 때, 친구들의 생일이나 편지를 쓰고 싶은 순간에 여행지에서 사 온 엽서를 종종 활용한다. 여행지에서 기억에 남는 그 이미지에 마음을 담듯 한자씩 정성스레 눌러 글자를 적는다. 추억과 감정을 담은 엽서편지는 편지를 쓰는 행위가 귀한 요즘과 반대되는 나만의 취향이 되었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한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속 한 구절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통해 나라는 사람을 구성하고 취미와 취향은 그 정체성을 더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여전히 나는 종종 시도했던 것들과 나의 공간에 자주 등장하는 것들을 살피며 계속해서 나를 발견해나가려 한다.
마흔의 시기는 좋아하는 것이 보다 짙어지는 시기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 좋아하는 것을 알지 못하더라도 지난 시간 동안 내가 무엇을 주로 해왔고 자주 거쳐간 물건, 장소, 사건을 곱씹어보면 하나쯤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 시기이다. 그 공통점들이 하나둘씩 모여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은 무엇일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나의 정체성을 구체화시킨다. 하나씩 수집한 나의 정체성 요소들이 40대를 생각하면 불안하기만 한 마음의 요소들을 하나씩 바꿔나가지 않을까.
지금 그 수집을 시작해도 늦지 않다. 오히려 지금부터 하나씩 수집해서 마흔의 시기를, 그리고 죽을 때까지 즐길 일을 만들어나간다는 건 삶의 끊임없는 활력을 불어넣는 것일 테니. 그래서 나는 오늘도 지난 시간들 속에서 공통점을 수집하고 취미와 취향을 고민한다. 하나씩 찾아가는 나의 취미와 취향이 마흔의 시작을 기꺼이 즐겁게 맞이해 주리라 믿으며. 그리고 그 시간과 함께 무르익어갈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