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과 보낸 시간, 그리고 그 시간 속의 내 모습
하지만 진짜 문제는 살지 못해서 아쉬워하는 삶이 아니다.
후회 그 자체다.
바로 이 후회가 우리를 쪼글쪼글 시들게 하고,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을 원수처럼 느껴지게 한다.
- 매트 헤이그,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中 -
제주에서 지낸 공천포 마을은 작은 바닷가 마을이다. 올레길 5코스 길에 있는 마을은 몇 가지 특색을 갖춘 음식점과 카페가 있는데 이마저도 6시가 되면 문을 닫는다. 해가 지면 하루 종일 걸은 사람들의 쉼을 방해하지 않는 적당한 파도소리와 어르신들의 세월이 스며든 발자국 소리가 마을을 채운다. 이러한 마을에 평일 오후부터 사람들이 쉴 틈 없이 드나드는 식당이 하나 있는데, 바로 공천포 식당이다. 이름부터가 공천포를 대표하는 공간으로 보일 정도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새콤달콤한 물회가 아닌 된장 베이스의 제주식 물회가 유명하기 때문이다. 잠시나마 동네 주민으로서 맛보지 않을 수 없어 유독 날씨가 흐린 날에 공천포 식당을 찾았다.
"전복 물회 하나요"
이윽고 된장 베이스 가득한 국물 위에 무수한 전복이 정갈하게 썰어 올라간 물회 한 숟갈을 떠서 입에 넣었다. 호불호가 강하다 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맛있어서 기분 좋음과 함께 전복, 한치가 반반씩 들어간 반반 물회를 시킬걸 후회가 되었다. 제철 한치를 전복과 함께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친 것만 같았다. 다시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전복의 식감을 느끼는 순간에도 한치를 먹지 못한 슬픔에 아쉬웠다. 물회 하나 시키는 것에도 이러한 후회가 따르기 마련이다, 하물며 내 삶의 방향을 좌지우지하는 선택에도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가 따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4번의 회사를 거치고 4번째 퇴사를 한 지금, 퇴사를 후회한 적이 없냐는 질문은 내게 단골 질문이다.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도 매번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매번 이직을 하지 않고 퇴사부터 선택하는 내 행동에 후회한 적이 딱 한 번 있다. 2번째 회사를 그만두고 잠시 휴식기에 엄마와 내가 동시에 몸이 좋지 않아서 정밀검사를 각자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그 하루 퇴사를 후회했다.
'혹시나 만약에 일이 생긴다면, 회사를 계속 다녔으면 병가로 쉬는 것이 더 좋았을걸'
'전 회사 건강검진 덕을 봐서 엄마의 상태를 미리 알 수 있었네'
몸이 아프다는 사실보다 혹시나 그럴 경우 앞으로를 생각해야 하는 현실이 더 차갑게 와닿은 하루였다. 돈을 모아야 불안한 순간을 견딜 수 있다고 한결같이 이야기하는 엄마의 말이 절절하게 와닿은 하루이기도 했다. 점차 둘의 건강이 안정화되면서 후회했던 순간이 언제 있었냐는 듯이 사라졌다.
다른 회사를 고려하지 않고 무모하게 나왔어도 그런 걱정보다는 도전이 많은 하루들이었다. 물론 이직 과정에서 오는 탈락 문자, 메일들에 아오! 화가 나다가도 바로 '나는 일복이 있는 여자라서 이런 내 일복을 알아보는 회사는 분명 있을 거다. 쉬는 김에 더 쉬자' 라며 터무니없는 긍정을 뿜어내는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문득문득 그리운 순간들이 있었다. 공천포 앞바다의 잔잔한 파도를 따라 내 기억도 더듬어본다.
누가누가 더 힘든 상활들이 펼쳐지나 대결했던 점심 멤버들
첫 퇴사 후 이직한 곳은 공공기관이었는데, 그때 같은 본부지만 각 실이 다른 사람들과 점심을 함께 했다. 같은 층과 파티션을 공유한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친해진 걸까. 그들은 내가 부처나 업체로부터 업무 스트레스를 받은 날엔 매 맞고 들어온 동생 때문에 분통 터트리는 언니들처럼 나 대신 원 없이 욕해주고 내가 좋아하는 극강의 매운 떡볶이를 시켜주었다. 내가 퇴사를 결심했고 회사에 통보했다고 하자 "잘했어~ 그래 잘했어~" 하다가도 "음.. 내가 너 일해줄까? 이 정도면 1년 더 버틸 수 있지 않을까?" 하며 나보다 더 오락가락 안절부절 행동하던 멤버들이었다.
점심 멤버 중에 회사 친구인지 그냥 원래부터 내 친구인지 모를 정도로 친해진 친구도 한 명 있다. 8년 가까이가 흐른 지금은 나의 유일한 차박 메이트가 되었다. 퇴사 후에 연락할 사람 1명만 있어도 그 회사를 잘 다닌 거라고 누가 그랬는데, 그렇다면 감히 잘 다녔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어떻게 이 친구와 이토록 친해졌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내가 도움을 요청하면서 시작된 것은 분명하다. 사기업에 있다가 공공기관으로 이직해서 모든 문화가 낯선 내게 "우리는 동갑이니까, 우리끼리라도 뭉치고 친하게 지내자"라고 손 내밀 었던 친구이다. 내가 일에 치이는 시기이면 술 사준다고 달래주고, 친구가 치이는 시기에는 내가 사주며 들어주었다. 여행 패턴도 비슷하고, 생활패턴과 가치관도 이럴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비슷하다.
내가 퇴사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나에게 묻지 않고 그 친구에게 왜 그러는지 물었다. 내가 퇴사하는데 그 친구가 아쉬울 꺼라며 동료들은 그 친구를 걱정할 정도였다. 어쩌면 나는 아마 쌓여있는 일이 걱정되다가도 다음날 그 친구랑 놀 생각에 회사를 갔었는지도 모른다. 오늘처럼 맛있는 물회 한 사발을 혼자 먹는 점심에 문득 지금 그 멤버들은 무엇을 먹을까 생각되면서 그 사람들과의 점심시간이 참 그립다. 그 이후에 이직 후 회사에서도 이런 멤버들을 만나보지 못했고, 훗날 또 다른 회사에 가도 절대 이런 사람들은 만날 수 없을 거라 생각되어 더 그리울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고마운 나의 사수들이여_1
역시나 공공기관에서 일할 때의 나의 첫 사수는 조용하고 쑥스러움이 많으신 분이었다. 정확히 일을 함께 한지 2년 만에 말을 놓고 편하게 대하신 분이다. 모든 남자 팀원들 사이에서 혼자 여자인 나를 배려하고 또 배려하신 분이다. "위원님이 보실 때 저 잘하고 있어요? 저는 저를 잘 모르겠어요. 저한테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겠어요" 함께 일 시작한 지 한 달 되었을 때 이렇게 당돌하게 묻는 후배에게 "실장님의 기대치가 높아서 그래요. 빠른 시간 내에 만족시키려 할 필요는 없어요. 지금처럼 해요"라고 말해주는 사수였다.
업무 하다가 일이 잘 안 풀리던 날, 내외부로 인해 한숨이 가득 찬 날, 오늘도 야근 당첨이구나 싶던 날, 사수가 담배 피우러 아지트로 갈 때면 졸래졸래 뒤따라갔다.
"A업체가 갑자기 이번에는 참여 안 한다네요"
"제도 참여시키려면 업체별로 인센티브를 줘야 하니까 업체별로 컨택하려고요. 근데 힘들어요"
"위원님 저 설 연휴 붙여서 쓰는 휴가는 꼭 가야 돼요"
사실 사수가 생각을 하는 자리인데 오히려 따라가서 내 고민과 문제를 해결하고 나오기 일쑤였다. 크고 작은 위로도 혼냄도 없이 한결같이 내 이야기를 먼저 들어주고는 필요할 때 필요한 말을 해주셨다. 이윽고 친해지니 떠나냐는 핀잔을 보인 그 사수가 문득 그립다.
고마운 사수들이여_2
따끈따끈(?!)하게 바로 직전의 회사에서 만난 팀장님은 언니와도 같았다. 착하지만 우유부단한 상사보다 논리적이며 칼 같은 상사가 팀원에게는 더 이롭다. 팀장님은 항상 웃는 얼굴이셨는데 웃는 입에서 명확한 정무적 판단이 나오는 것이 늘 놀라웠다. 그리고 홍보팀의 방패와도 같았다. 명확하게 부당한 관리자의 업무 지시는 팀원에게 오지 않도록 앞에서 막아주셨고 팀원들에게는 정확한 업무 방향을 지시했다. 점심시간에는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라고 하는 이 시대 당연한 상사였다. 회사가 폐업되기 직전에는 개인적으로 지금 준비하는 곳이 있냐며 늘 관심을 갖고 여기저기 추천해주셨다.
가족인 언니와 동생도 서로에게 상처받고 힘들어하는 순간이 종종 있다. 홍보팀 2명이 한꺼번에 빠져서 모든 것을 혼자 처리해야 했을 때, 폐업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업무가 나에게 몰리는 것을 느꼈을 때가 있었다. 사회생활 9년 차임에도 성숙하지 못한 나는 얼굴 표정으로 모든 감정을 드러냈다. 당연 팀장님도 느끼고 불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내 나를 다독여 주셨다. 감정적으로 좋지 않은 순간을 다스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방향을 바꾸는 보고 방법을 알려주셨다. 언니는 동생에게 다시 한번 사회생활을 알려주고 조언했다. 내가 제주에 있는 동안에도 먼저 연락을 주시며 준비하고 있는 것들을 손수 알아보고 알려주셨다. 팀장님은 내가 잘해주었기에 잘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말씀 주셨지만 나는 안다. 4번의 회사를 거치며 이런 상사를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조직 내에서 업무적으로 배울 수 있고 사적으로 웃을 수 있는 팀장을 만난 건 복 중에 크나 큰 인복이다.
팀에서 말하지 못하는 것들은 이들과 함께. 그 이름하여 동기들
종종 회사에 동기가 없어서 힘들다는 사람들의 고충이 무엇인지를 안다. 나도 여러 번의 이직 중에 동기가 없었던 곳도 있는데 그곳에서 유독 동기 없는 서러움을 더러 느끼기도 했다. 각기 다른 팀에 흩어져 일하지만, 무엇 하나 알아봐 달라고 하면 제일 먼저 알아봐 주는 사람들이 동기다. 도움 요청도 1번, 위로와 공감도 1번, 정보 공유도 늘 1번이었다. 매년 입사 날을 기념하며 이번 1년도 무사히 넘겼다고 서로 자축하며 토닥였다. 특히나 각 산업군에서 비전공자인 내가 제일 먼저 그만둘 것 같았는데 잘 적응하는 것이 대단하다며 치켜세워준다. 그 칭찬에 부응하기 위해 어쩌면 1년, 2년, 3년을 버텼는지도 모른다.
동기들 중에서도 제일 친했던 동생이 한 번은 전화를 해서 "언니, 너무 일이 힘들어. 여기 너무 힘들어졌어"라고 말했다. 그 회사는 조직개편, 인사이동 등으로 인해 많은 변화를 겪고 있었다. 회사에서 우리들 중에 시키는 것을 묵묵히 제일 열심히 그리고 잘하는 동생이 괴로움을 한없이 쏟아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친한 회사 친구도 "힘들다"라는 말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 현장에서 벗어난 나로서는 들어주는 것밖에 해줄 수가 없었고 들으면서 참 마음이 아팠다. 회사 현황을 꿰뚫고 있는 사람으로서 딱딱 말만 하면 잘 알아듣기에 이들은 나를 찾는 것이다. 안에서 토로할 수도 그렇다고 밖에 함부로 내뱉을 수도 없기에 나에게 쏟는 것이 유일한 해소일 때가 있을 것이다. 사람마다 견디는 강도와 생활하는 가치관과 마음 여유의 크기가 다름을 잘 안다. 그래서 나처럼 무모하게 퇴사하라고도, 어쩌겠냐며 버티라고도, 가서 뒤엎으라고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그들의 상황을 들어주고 또 들어주었다. 그들이 끊임없이 쏟아냈던 내 부정적인 언어들을 다 받아주었던 시절처럼 말이다. 그 시절의 감정적 채무를 나는 퇴사한 후에 이렇게나마 갚고 있다.
이렇듯 문득문득 그리운 순간들은 사람들과 함께한 시간이다. 쌓이는 일더미 속에서도 깔깔깔 웃고, 망한 프로젝트는 소주 한 잔으로 흘리고, 야근할 때 함께 꽂힌 노래를 잔잔히 틀어놓고 일하고 했던 시간들 말이다. 그 시간들이 떠오를 때면 '아, 나 그렇게 힘들다는 말을 달고 살았어도 사람들과 재밌게 일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미소 짓게 된다. 일에 허덕여서 때때로 회사생활이 숨 막히는 거 같았다. 퇴사 후 제3자 입장으로 느낀 기억에는 크고 작은 숨통이 참 많았구나 싶다. 그래서 감사한 마음이 든다. 크고 작은 숨통이 있었기 때문에 크게 숨 한번 들이쉬고 힘들었던 순간을 '후' 내보내고 그다음을 나아갈 수 있었다. 이렇게 고백해보건대 나도 그들에게 작은 숨통이 되었기를 희망한다.
※ 참고
이 이야기는 나와 가깝게 지낸 지인들 위주로 편집되어 아름답게 편향된 기억일 수 있다. 나의 퇴사 사유에 사람이 큰 차지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냥 아름다운 사람들만 있었다면 굳이 퇴사의 길이 최선은 아니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