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섦의 미학 1: 노마드 산책 6, 에필로그

무지개는 멀리 있지 않다

by 리빙북

떠날 시간이다. 아니 돌아갈 시간이다.


익숙한 곳을 떠나 낯선 곳에 왔고 이제 그곳은 내게 조금은 익숙한 곳이 되었다.

익숙해진 공간을 떠나 더 익숙한 나의 자리로 돌아갈 시간이다.


우리는 떠나고 싶어 하고 떠나 있으면 돌아오고 싶어 하는 영원한 노마드로 살아간다


누구보다 떠남과 돌아옴의 순환이 많은 삶을 살아왔다.


코로나 전 1년에 200여 일의 해외출장을 다니던 시절, 너무나 고단한 일정에 지쳐 쓰러질 것 같다가도 한국에 돌아와 한두 주가 지나면 기차역 근처에 가도, 고속 터미널 앞의 먼 행선지의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나는 천상 노마드가 숙명인 사람인가 보다.


치앙마이의 낯섦이 내게 준 선물을 떠올려 본다.


걸으며 또 오토바이 뒷자리에 타고 바람을 맞으며 보았던 치앙마이 수로(해자)와 오래된 성벽들, 사각의 치앙마이 올드타운 동서남북을 감싸고 있던 이끼 낀 붉은 벽돌의 게이트들.


새로운 골목길을 들어설 때마다 새로운 속살을 보여주던 골목길의 풍경들.

새벽 시장에서 보았던 생명을 깨우던 신선한 소란함의 삶의 현장들.


내 허기를 경이로움과 감탄으로 채워주던 길거리 음식들.골목마다 들어서 있는 스타벅스를 부끄럽게 할 장인들의 커피들.


그리고 어떤 자리를 떠날 때마다 두 손을 모아 인사를 건네는 치앙마이 사람들.


그중에서도 마음과 머리에 깊게 남은 순간이 있다.


새벽 시장에서 마주친 탁발과 공양의 모습이었다.


새벽시장 어디에서나 탁발을 하는 스님과 공양을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작은 빵 하나, 쌀밥 한 봉지 등 작은 봉양을 드린 후 길거리에서 무릎을 꿇거나 앉아서 봉양을 드린 사람과 스님이 나누는 간절한 기도의 모습은 떠들썩한 시장통의 소음과 부산함이 일순간 멈춰진 영화 속 한 장면같이 내게 다가왔다.


치앙마이 어느 사원에서나 마주친 금빛 불상에서 느끼지 못했던 어떤 환한 빛이 그들에게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크리스천인 나에게도 신비로운 순간이었다.


[소란 속의 고요한 빛]


분주한 새벽시장 한켠,
주황빛 가사 아래 고요히 선 스님과
두 손 모은 소녀와 엄마 사이에 흐른 건
쌀 한 줌이 아니라 간절함.

세상의 소음은 그 기도의 숨결 앞에 잠시 멎었고,
나는 그 고요한 순간의 빛을 가슴 깊이 받아 안는다.


-리빙북-

치앙마이게이트마켓의 공양의 모습


내겐 어디를 가나 풍경이나 경치를 통해 받는 감흥보다는 그곳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얻는 감흥이 더 크다.


아무런 대가 없이 아침마다 새벽시장에 나를 오토바이로 데려다준 C. 헤어질 때마다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숙여 인사하는 사람들, 산에 오르며 대화를 나누었던 이름 모를 여행자들. 쌩태우의 좁은 뒷자리에 같이 탄 교복 입은 여학생의 수줍은 미소까지.


내겐 꽃보다 사람인가 보다.


이번에도 나는 내가 지향하는 느림의 여행을 하였다.느림의 여행의 기본은 걷는 것이다.

내 발로 걸어 본 그곳에 내 마음도 생각도 머물게 되고 눈에서 머리로 가슴으로 내려와 오래 남게 된다.


발로 땅을 밟으며 걸었던 남해의 바닷가, 제주의 오름과 올레길, 청산도의 산길, 순천의 습지와 선암사, 통영의 수많은 다도해의 섬 등 발자국을 남긴 곳들이 나의 마음속 고향과 같은 영토가 되었다.


이번 치앙마이에서도 숙소에 머무는 시간을 제외하면 가능하면 올드시티를 내 발로 걸어 다녔다.


걸어서 보는 풍경 못지않게 오토바이라는 신문명에 올라타고 본 치앙마이의 풍경은 또 다른 시선과 기대하지 못했던 바람을 가르며 아스라한 풍경이라는 선물을 주었다.


매일 떠나기를 꿈꾼다 해도 현실적으로 우리는 삶의 터전에 발을 딛고 서서 나무와 같이 일상을 살아간다.

그 일상의 삶에 발을 딛고도 낯선 곳으로의 떠남은, 여행은 가능할까?


내게 여행 관련 최고의 철학적 인문서인 “여행의 기술”(Art of Travel)에서 알랭드 보통은 그에 대한 답을 해주고 있다.



여행의 목적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The real voyage of discovery consists not in seeking new landscapes, but in having new eyes)

알랭드 보통, 여행의 기술


매일 바라보는 동네의 나무들도 바람과 햇빛 방향에 따라 매 순간 다른 모습을 연출하고

하늘의 구름도 바람에 흩어지며 매 순간 모습을 바꾼다.

한강 다리 너머로 떨어지는 석양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 그 색을 달리한다.


우리는 낯선 땅을 탐험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지만

진정 놀라운 것은 돌아온 후 익숙했던 것들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는 일이다.

(What we find exotic abroad may be

what we hunger for in vain at home)


내가 살던 동네의 거리를 낯선 나라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그곳은 더 이상 지루한 골목이 아니라 하나의 여행지가 된다.

알랭드 보통, 여행의 기술


알랭드 보통은 공간으로의 이동이라는 여행의 의미를 넘어 시선의 변화가 우리를 여행으로 이끈다고 얘기한다. 나의 시선이 바뀌는 곳마다 새롭고 낯선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40도에 육박하는 더위가 이 땅의 대지와 대기를 달구고 있다.


이 여름 내가 사는 동네 근처의 안 가본 뒷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겨 보지 않겠는가?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시원한 에어컨이 나오는 아무 버스나 전철을 타고 내가 가보지 않은 동네에 내려 보는 건 어떨까?


우리가 찾던 무지개가 우리 앞에 나타날지 누가 알겠는가?


무지개는 멀리 있지 않다.



*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전철을 타고 한 번도 와보지 않은 낯선 동네의 산속에 보물처럼 자리 잡고 있는 지혜의 숲, 강동숲속도서관에서 치앙마이로 추억 여행을 떠나고 있다.






수,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