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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jin Oct 07. 2022

어느 국제 학교 이야기

( 차마 하지 못했던 그녀들의 속사정)


 그녀들의 아이들은  학비가 5천만 원쯤 되는 상하이 어느 국제 학교에 다닌다.  아이들은 미국인 네이티브 선생님에게 영어로 미국식 교육을 받으며, 잘 가꾸어진 시설에서 온갖 액티비티를 하며 행복하게 특별한 외국인 대우를 받으며 잘 자라고 있다.  이렇게만 이곳에서 쭉 자란다면 아이들은 소위 말하는 상류층이 될 거 같다. 아이들의 행복한 얼굴, 풍족한 환경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고 생각한다.




A는 한국에서 다니던 직장을 잠시 휴직하고 대기업에 다니는 남편을 따라왔다.  한국에서 남편과 나의 월급만으로는 절대로 보낼 수 없는 국제 학교에 회사 지원으로 둘이나 보낼 수 있다니,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거기다가 깨끗하고 넓은 아파트 렌트비까지 회사에서 내어주고, 주재비에, 한국에서 나오는 월급까지 보태니 경제적으로도 한층 여유로워졌다. 한국에서 명절마다 부딪히던 시댁 문제도 없고, 무엇보다 이곳에서 "아이(阿姨)라고 불리는 도우미 아줌마까지 매일 오시니,  이젠 여기가 천국 같이 느껴진다.  

  주재 기간이 일 년 이년 삼 년 늘어갈수록 이곳을 떠나기는 싫어진다. 남편 말로는 최대 2년 이면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하는데, 그러면 다시 한국에 들어가 나는 직장에 복귀해야 하고,  아이들은 다시 입시 전쟁에 뛰어들어야 한다. 우리 아이들은 이미 삼 년 가까이 이곳 학교에서 행복하게 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영어로 책을 술술 읽고, 내가 떨면서 겨우겨우 내뱉는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면서 중국어까지 하는데, 도우미 아줌마도 없고, 겨우 25평 남짓한 좁아터진 곳에서 , 매일 아침마다 출근 전쟁을 하며 두 아이를 건사할 자신이 없다. 그렇게 3년을 살아왔는데, 여기서 지낸 지난 3년간의 시간이  내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평범한 일상을  두렵게 만들었다. 

   남편에게 요즈음은 중국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도 많이 들어와, 한국 연봉의 3,4배를 받고, 애들 학비에 렌트비까지 다 해주면서 데리고 간다던데, 그런 오퍼를 받은 적은  없냐고 물어봤다. 고지식한 남편은 그런 건 처음에 잘해주다 나중엔 버림받기 일수라며 꿈도 꾸지 말고 귀국할 준비를 시작하라고 한다. 

 이곳의 생활은 황홀하다. 오전 7시가 되면 아이 둘은 스쿨버스를 타고 등교하고(스쿨버스비는 회사에서 내주는 것이 아니지만 이 정도는 쓰기로 했다) , 남편까지 회사에 출근하면 도우미 아주머니가 오신다. 그러면 나는 짧은 중국어로 아줌마와 몇 마디 나누고,  간단히 치장을 하고 나간다. 여기서 알게 된 동네 한국 여자들, 특히 같은 학교를 보내면서 알게 된 여자들과  같이 점심을 먹고 커피까지 마시고 나면 도우미 아줌마가 깔끔하게 청소해 놓은 집에 들어가 잠시 쉬면 아이들이 온다.  이곳에 와서는 청소 같은 건 해 본 적이 없는 거 같다.  아이들이 오면 아줌마에게 아파트 클럽하우스에서 하는 수영 레슨에 아이들을 넣어주고 오라고 지시한다. 그럼 나는 그동안 아줌마가 만들어 놓은 저녁을 차려 놓기만 하면 된다. 아줌마는 이제 우리와 3년을 지내 그런지 딱히 뭘 하라 지시를 하지 않아도,  아이들 픽업 시간, 가야 할 수업 시간을 잊어버리지 않고 알아서 애들을 잘 챙겨 다닌다.  

  가끔 생각한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원래 내가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이었는지, 아니면 허상과 같은 것들인지를...... 남편의 귀국 발령과 함께 사라질 신기루 같은 것이지만,  지금 현재 나는 행복하다. 그리고 이 신기루가 사라질까 봐 불안하다. 



B 는엘리트 인도인인 남편이 이곳에 발령을 받았을 때 만세를 부르고 싶었다. 

 남편과 나는 인터넷 채팅으로 만났다.  욕심도 많고 샘도 많은 내가  가난한 친정을 탈출할 방법은 딱 하나였다. 외국으로 가는 것, 거기서 무엇이라도 해서 돈을 벌어 그곳에 자리 잡고 사는 것.  그래서 그렇게 무작정 떠난 미국. 마사지 샵에서 일했고, 그곳에서 인터넷 채팅으로  미국에 잠시 나와있던 남편을 만났다. 나는 피부 하얀 동아시아 여자였기에 나의 학력이나 배경이 그를 만나는데 조금도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공주처럼 떠받들어 주는 인도 남자, 부유해 보이는 그, 인도에서의 상류층 삶, 한국에서는 감히 상상하지도 못한 결혼이었다. 신데렐라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막상 결혼을 하자, 다른 문화와 종교가 만들어 내는 끝없는 문제와 싸움, 대단한 시댁 문화....... 거기서 나를 신데렐라로 만들어 준 남편만 빼내어 이곳으로 온 것이다.

  이곳에서 나의 두 아이는 사람들이 당연히 미국 국적으로 알고 있다. 인도인과 결혼했으니 당연히 인도계 미국인이라 생각하는 듯하여,  굳이 밝히지 않았다. 부모 그늘 밑에 곱게 자라 공부만 하고, 직장 다니다 능력 있는 남편 만나 사는 그녀들은 아마 가난이 무엇인지, 부모가 짐으로 느껴지는 것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나는 그녀들보다 영어를 잘하고,  상류 인도인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혹은 인도에서 자랐으면 외모로 차별받았을 아이들은 여기 국제 학교에 너무나 어울리는 외모이고, 오히려 돋보이기까지 한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미국 간호사로 남편을 만난 여자가 되어 있었다. 내가 미국에서 무엇을 했는지,  한국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묻어버리기로 했다.  여기서의 나의 역할은 '인도 상류층으로 시집간 미국 간호사 출신의 영어 잘하는 엘리트'이다.  비록 남편은 나를 무시하고, 덕분에 여기 와서 이렇게 산다며 대접받길 원하며, 중간중간에 친정에서는 손을 벌리지만, 그딴 거 아닌척하면 그만이지 뭐. 가끔 아이 학교 모임에서 진짜 미국인을 만나거나, 그곳에서 공부한 사람들을 만나면 말문이 턱턱 막히는 일도 겪지만, 가능하면 안 만나면 되니까....... 간단한 생활 영어에 칭찬해주는 한국인 그녀들만 만나면 그뿐이다.  나는 이곳에서 내가 꿈꿔왔던 내가 되었다.



 C는 아이의 학교에 가야 할 일이 생기면 무장을 한다.  

 그녀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할 만큼 고급지고 값비싼 옷으로 갑옷을 두르듯 머리부터 발 끝까지 완벽한 모습으로 간다.  나는 한때 모델이었다.   한류라는 것이 막 시작될 무렵 한국인 모델은 피부가 곱고 얼굴이 이쁘면서 세련되어  중국 광고주들이 좋아해 줘 한국보다 더 많은 모델료를 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나도 그때 에이전시를 통해서 왔다. 막상 이곳에 오니, 언어 문제도 있었고, 또 한국보다 불투명한 사회 시스템에 듣던 만큼 모델일은 많이 들어오지 않았다.  중간에 돌아가는 동료들도 많았지만, 나는 이곳에서의 삶이 그럭저럭 괜찮았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나는 젊은 육체가 있었고, 어설픈 중국어로 살짝살짝 웃어만 주어도 중국 부자들은 나에게 아낌없이 지갑을 열었다.  그러다가 아이의 아빠를 만났다. 이미 가정이 있는 남자, 나보다 나이가 20살은 많은 남자. 그리고 부자....... 나는 이곳 언어로 얼나이(二奶)로 불린다. 처음엔 딸이, 얼마 전엔 아들이 태어났다.   돈만 있으면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에는 이쁜 것들이 너무 많으니까, 그리고 아이의 아빠는 그것들을 나에게 안겨 줄 능력이 있었다. 쇼핑은 해도 해도 질리지 않았고,  옷방은 각족 명품으로 채워졌다.  어딜 가나 vip대접을 받았고, 아이들은 아빠를 자주는  보지 못했지만 돈으로 채워 부족함 없이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이의 학교에 한국인이 입학하기 시작했다. 부득이하게 아이는 그 한국 아이들과 친해지고 나도 그들과 인사라도 나눠야 할 순간이 생기기 시작했다.  영어도 중국어도 하지 못하는 나는 가끔씩 그녀들이 나에게 눈이라도 마주치고 인사를 해주면 반가운 마음도 생긴다.  쇼핑 말고, 내 나라 말로 속 시원하게 사소한 수다를 떨고 싶어지기도 한다. 이곳에 오기 전처럼 깔깔 거리며 웃고, 간편하게 입고 나가 속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친구가 그립다.  하지만 아이를 위해서 나는 그럴 순 없다. 비록 내가 선택한 얼나이의 삶이지만, 내 아이가 같은 나라 사람들에게 '첩'의 자식이라는 소리를 듣게 만들 순 없다.  나는 연기를 한다. 감히 접근하기 조차 어려운 부자 남편을 가진 화려한 외모의 한국 여자. 그들과는 차원이 다른 상류층의 삶을 사는 여자로....... 그래서 나는 아이의 학교에 갈 때 갑옷을 두른다. 가장 높은 힐을 신고,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명품 가방을 들고, 큰 키가 더 돋보이는 코트를 입고, 기사가 운전해 주는 고급 차를 타고, 한껏 힘을 줘 세팅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그렇게 간다. 아직까지 그 갑옷은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 것 같다.



  D는 경제적으로 풍요롭다. 얼마 전에 태어난 늦둥이 공주까지 아이가 셋이다.

남편은 중국 다른 도시에 사업장이 있다. 규모가 꽤 큰 공장이고, 사업은 비교적 탄탄하다. 처음에 애 둘을 데리고 말도 통하지 않는 이곳에 와서 했던 고생을 생각하면 진절머리가 나지만, 사업이 잘 되면서  아이 둘을 학비가 꽤 비싸다는 이곳에 자비로 보낼 수 있고, 고급 아파트에, 거기다가 아들만 둘이 있다가 늦둥이 막내딸까지 얻었으니 이곳에서의 삶이 꽤 만족스럽다. 

  나는 얼마 전에 이곳으로 이사 왔다. 그 전엔 작은 도시에서 살았다. 아이들이 좀 커지고 수입이 좋아지니 남편이 먼저 더 큰 도시에 가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것이 어떠냐고 해,  아이 셋을 데리고 이곳으로 이사 왔다. 입주 도우미 아줌마가 있으니, 늦둥이를 키우는 건 힘들지 않다.

  얼마 전 아이 학교 여자들과 친해지기 위해 남편 공장에서 만드는 물건을 싸게 팔았다. 원래 한국에 수출하는 거라 그 가격에 줄 수 없는 것이었지만, 전학 온 지 얼마 안 되어 친구 사귀기가 힘들어 보이는 첫째와 둘째를 위해 그 정도의 금전적인 손실은 감소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남는 것도 없이 판 물건에 문제가 생겼다며 교환을 해달라고 한 거다. 화가 났다. 남편 공장의 물건은 최상급이다. 진짜와 구별이 되지 않을 만큼 정교하게 만들어진다. 그런데 거기에 토를 달다니....... 그래서 교환은 안된다고 했다. 그런데 그쪽에서 난리가 났다.  가짜를 만들어 파는 주제에 쓸데없는 자부심은 뭐냐며, 당장 교환해 주지 않으면 공안에 신고를 해버리겠다고 했다. 나와 남편은 가짜를 만들어 판다, 그런데 가짜를 사면서 그 갑질은 뭐지? 나는 가짜를 들고 다니지 않는다. 나는 진품만 들고 다닌다. 

  가짜를 들고 다니며 허영을 부리는 여자들은 한심하다.  남편 공장에서 만든 가방을 단체 유니폼처럼 같은 모습으로 메고 다니는 그 여자들은 우스꽝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그 사건 이후로 난 그들과 거리를 뒀다. 아이는 이미 고학년이 되었고,  남편의 사업은 날로 번창하고 있으니, 짝퉁 팔이 부모를 뒀다는 말로 아이가 상처받지 않게, 첫째와 둘째는 조만간 보스턴에 있는 보딩 스쿨로 보낼 예정이다. 결국은 우리 아이들은 그녀들의 아이들보다 더 양질의 교육을 받으며 살 것이다. 진짜 미국에서 진짜 미국 교육을 받으면서. 

  이곳 여자들은 허영심에 가짜를 두르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E의 남편은 원래 대기업 주재원이었다.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학 이곳으로 발령을 받아와 귀국 발령이 났을 때는 중학생이 막 되었을 때였다. 아이는 이미 한국어보다 영어가 익숙한 상태였고, 한 번도 아이를 한국에서 학교를 보낸 적이 없는 우리는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우리 아이가 한국 입시를 감당해 낼 수 있을까? 그 걱정부터 앞섰다. 이곳에서 (정확히는 외국에서 ) 12년 동안 학교를 다니면 '12년 특례'라는 것이 있어, 한국 명문대를 쉽게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이곳에서 잘하면 미국 대학은 갈 것이고, 그게 힘들면 한국 명문대라도 쉽게 갈 수 있다고 하니, 버텨 보자는 생각부터 들었다.  남편은 한국으로 혼자 귀국했고, 그렇게 나와 아이 둘만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회사에서 내어주던 학비와 아파트 렌트비도  남편의 월급 안에서 충당하게 되었다. 소위 말하는 기러기가 된 것이다. 아이는 다니던 학교에 쭉 다니고 있지만 우리는 아이 학교 앞에 있는 작고 낡은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이곳 여자들과 어울려 치던 골프도 그만두었고,  도우미 아줌마도 이젠 쓰지 않는다. 

  나는 전문대를 겨우 졸업했다. 경리로 일하고 있던 회사에서 업무상 외근을 나가 그곳에서 일하던 남자를 만난 게 지금의 남편이고,  서울에 있는 명문대를 졸업한 남편이 데리고 온 나를 시댁에서는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아이를 명문대에 보내고 싶다.  

  아이는 공부를 할 마음이 없는 듯하다.  이곳에서 만나는 부자 중국 아이들, 백인 아이들과 어울리며 노는 것을 공부하는 것보다 더 좋아한다. 이미 내 말은 무시하기 일쑤이고 혼이라도 낼라치면 영어로 말대꾸를 하며 알아듣지 못하는 나에게 빈정댄다.   아이는  방학마다 해외로 여행 다니는 아이들을 부러워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돈을 턱턱 쓰며 명품을 걸치고 다니는 친구들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왜 자기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지 화를 낸다. 아이 아빠는 직장 근처 작은 원룸에 살며 월급의 대부분을 우리에게 보낸다. 아이도 나도 오랜만에 남편을 만나면 어색하다. 남편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우리는 가족이지만 진짜 가족이 아니다.  

  이제 2년만 더 버티면 아이는 이곳에서 졸업하게 된다. 요즘 12년 특례로 무조건 서울대에 갈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한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그 사이에서도 우수하고 특출 난 아이들만 갈 수 있단다. 우린 국제 학교를 졸업한 아이를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로 유학 보낼 여유조차 없다. 아마 아이는 서울 안에 어느 대학에 들어갈 거 같다. 그래, 그렇게만 해주면 된다. 나는 그러지 못했는데, 그렇게만 해주면 된다. 나보다 좋은 학교에 들어 갈거니, 그러면 되는 것이다. 



F는 미국인이다. 정확하게는 한국계 미국인, 즉 이민 1.5세대다. 

  나의 부모님은 뉴욕에서 작은 편의점을 하고 계신다. 나는 햇볕도 들어오지 않는 반지하에서 미국 생활을 시작하였다. 우리는 가난하였고, 부모님은 늘 피곤하고 바빴다. 나는 여느 한인 아이들처럼 열심히 공부했다. 그래야 반지하를 탈출할 수 있으니...... 햇볕이 잘 드는 백인 동네에 집을 마련하는 것이 어린 나의 꿈이었다. 남편도 나와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하고 나서 아이가 둘이나 생겼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기회가 왔다. 남편이 이곳으로 발령이 난 것이다. 나는 아이들이 다니는 외국인 국제 학교 옆 햇볕 잘 드는 넓은 별장 단지에서 백인들과 같이 살게 되었다. 꿈이 이루어졌다.  미국에 있었다면 상상하지 못했을 시설과 규모를 가진 사립학교에 아이들을 보내는 것도 뿌듯한 일이었다. 하지만 백인들은 여전히 불편하다.  이곳에 사는 백인들은 묘하게 우월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머리가 노라면 노랄수록 피부가 희면 흴수록 더 그랬다.  백인들은 학교를 중심으로 자기들만의 커뮤니티를 이루며 살고 있다. 나는 여기서도 그들에겐 이방인이다. 

  하지만 한국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오면서 나는 왠지 모를 희열을 느끼게 되었다. 영어를 못하는 한국 부모를 도와주기도 하고,  학교 공지사항을 전달해 주기도 하고,  베이킹 데이나, 인터내셔널 데이를 어색해하는 한국 엄마들을 모아 참여하기도 하였다. 자연스럽게 '코리안 마미 그룹(Korean mommy group)'이 형성되었고, 그 중심에 내가 서게 되었다.  미국 여자들은 우리가 그룹을 이루어 모여 다니면 그 옆을 지나면서 코리안 불고기가 맛있다느니, 김밥 만드는 걸 배우고 싶다고 하며  친절한 미소를 보인다. 한국 여자들은 그것을 아주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한다. 미국인의 인정을 받은 한국 문화 전파자 인양.......  그들이 친절한 미소를 보이며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미국에서의 학창 시절이 떠올라 얼굴이 붉어진다. 나의 닉네임은 '김치'였다.  백인 여자들은 분명, 영어 못하는 한국 엄마들을 뒤에서 '김밥' 혹은 '불고기'라고  부르며 낄낄 거리며 좋아할 것이 뻔하다. 

  그럼에도 나는 이곳 생활이 좋다. 혹시 모를 문제를 일으켜 영어 못하는 부모님이 학교에 불려 오는 것이 무서워 조용히 지내기만 했던 내가 이곳에서는 '왕언니'가 되어, 그녀들의 중심에 서 그녀들을 충고하고, 조언을 해준다. 가끔 내 맘에 들지 않은 사람은 버리기도 하고 다시 넣기도 하면서 이 한국인 여자들 사이에서 파워 놀이를 한다. 미국에 있었다면 결코 하지 못했을 '여왕'놀이를 한다. 이곳에 사는 동안 일단 즐기기로......



G는 한국인이지만, 남편은 중국인이다. 아이는 한국 국적이라, 그래서 여기 외국인 국제 학교에 올 수 있게 되었다. 남편과 나는 교과서를 달달 외워 공부하는 기계를 양성하는 듯한 중국 학교에 아이를 보내기 싫었다.  엄청나게 부자가 아닌 우리는 다행히 아이가 학교에 갈 나이가 되자, 아이 하나 정도는 국제 학교에 보낼 수 있게 되었고, 집에서 한국어, 중국어, 영어를 늘 접하고 썼던 아이는 아무 문제없이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해 왔다. 유치원부터 다녔던 탓인지, 아니면 엄마 아빠가 다른 나라 사람인 걸 아는지, 아이는 굳이 한국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았고, 중국, 백인, 혼혈, 한국 따지지 않고 두루두루 잘 어울리며 행복하게 학교를 다닌다. 

  나도 남편도 여기서 쓰는 언어에는 문제가 없기에, 아이 학교 행사에 매번 참여하고, 아이 친구 가족들과 종종 어울리며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  나는 한국인이지만 소위 말하는 '코리안 마미 그룹'에 들어가서 어울리지 않고, 만나면 과다한 교육경쟁, 돈 자랑만 해대는 중국 엄마들 그룹과도 거리를 둔다. 그렇다고 백인들과 어울리기에는 묘하게 빈정거리는 그녀들의 오만한 태도와, 언뜻언뜻 보이는 '내가 미계한 너희 동양인을 개화하러 왔다' 하는 선민의식이 불편해 그렇게 가깝게 지내지도 않는다. 다만 학교 행사나 봉사 활동에는 열심히 참여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나처럼 열심히 생활인으로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을 만나게 되고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차 한잔 정도 같이 하는 사이가 되기도 한다. 

  중고등부가 있는 카페테리아에서 일층을 내려다보면 한국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노트북을 펼쳐놓고 게임을 하기도 하고, 자기네들끼리 깔깔 거리며 웃기도 하고, 그런데 가만히 쳐다보면 아이들은 눈치를 본다. 백인 아이들의 눈치, 잘 나가는 화교 아이들의 눈치, 선생님들의 눈치, 커뮤니티를 이루어 학교를 운영해 나가는 이 학교 시스템 속에서 한국 아이들은 아웃사이더이다. 부모는 영어를 하지 못한다고 학교 행사에 오지 않고, 아이들에게 영어 잘하는 네가 알아서 하라며 미룬다. 심지어 학부모 상담에도 오지 않고, 그나마 성의가 있는 부모는 통역을 대동하고(대부분 학원 선생님) 나타나 통역에게 말하라고 한다. 덩치가 작은 한국 남자아이들은 운동을 다져진 덩치 큰 백인 남자아이들에게 보이지 않는 불링(bulling)을 당하기 일수다.  큰 아이들은 학교 수업보다 학원 수업을 더 열심히 들으러 다니고, 작은 아이들은 부모가 와야 하는 크고 작은 행사에 혼자 외톨이가 되어, 다른 아이들이 엄마 아빠와 하는 활동을 하고 사진을 찍을 때 교실 한 구석에서 목을 빼고 부모를 기다린다. 그리고 그 부모들은 아이들이 영어를 원어민처럼 쓴다고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한다. 

  오늘도 '코리안 마미 그룹' 은 떼를 지어 몰려와 카페테리아 한쪽에 자리를 잡고 깔깔거리고, 크게 한국어로 수다를 떨고 있다. 그리고 그 그룹에 공헌(?) 하지 않고 지내는 나를 한눈으로 힐끗힐끗 쳐다보며, 수군거린다.  나는 여기서 왕따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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