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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jin Dec 16. 2022

정말 특별난가요?

(국제 결혼에 대한 단상, 어떤이의 이야기)

 내가 알던 어떤 이(한동안 친했던 지인이라고도 불리는)는 "사람들이 날 보고 국제결혼을 한 것처럼 생겼데"라고 말을 했다.  그때 당황한 나머지, '그게 어떻게 생긴 건데요?'라고 물어보지도 못하고 '그런가요?' 하고 그 어떤 이의 대화를 싹둑 잘라버렸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내가 ' 국제결혼을 하게 생긴 건 어떤 건데요?'라고 물어보고 대화를 이어 나갔다면,  자신이 얼마나 뛰어난 외모이며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특별난 사람인지, 다른 한국 사람과는 어떻게 다른지, 자신의 파트너가(남편이) 혹은 자신이 얼마나 탁월한 선택을 했고, 외국인과의 결혼 생활이 얼마나 좋은지가 대화의 요지였을 것이다.  그 자리에선  "특별난 국제결혼을 한 우리(그녀와 나)"의 공감을 이끌어내어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어 한 그 사람의 말길을 막아버렸지만, 한동안 나는 '국제결혼을 하게 생겼다'는 건 뭘까에 대한 생각을 꽤 오랫동안 했었다. 일단 나는 내가 다른 나라 사람과 결혼을 했다고 해서 남다른 선택을 했다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국제결혼=> 특별한 이가 하는 것=> 국제결혼하게 생긴 생김새'까지의 사고가 이어지지 않아 당연하게도 결론이 날 수가 없었다.

   적절한 상황과 그와 나의 시간의 합이 맞아떨어지는 순간, 호감 가는 상대가 우연히 외국인이었을 뿐, 아무도 "나는 국제결혼을 해야지!"라고 결심하고 (물론 매매혼이나, 영주권 등등 목적을 가진 결혼을 제외하고) 외국인을 만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내가 특별나다는 생각은 어디서 온 것일까?


 일단 '국제결혼하게 생겼다'는 그 어떤 이는 '특별나다'라는 정의를 나쁜 쪽으로 보자면, 특별난 결혼 생활을 하기는 하고 있다.  

 그녀는 남편과 언어가 통하지 않았고, 그녀도 남편도 서로의 언어를 잘하지 못했다. 그녀는 초급 수준의 중국어를 구사할 뿐이었고, 남편은 한국어를 배울 생각도 관심도 없었다. 희한하게도 그 남편은 죽어라고 초급 수준의 중국어를 쓰는 그녀에게 죽어라고 영어를 썼다. 그렇다고 그 남자가 영어를 잘하냐? 그것도 아니었다. 그냥 대학 나온 중국인 발음의 기초적인 영어 (뭐, 그럼 너는 잘하냐?라고 물어볼 수 있지만 적어도 나는 그들보다는 확실하게 잘하는 것 같다 ). 텔레파시로 이야기를 하나? 싶을 정도로 언어가 통하지 않는데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애도 둘이나 낳는 걸 보면서 '사랑은 말이 필요 없어요'라고 낭만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건 동화책 안에나 존재하는 이야기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들은 아이 둘이 있다는 거다. 그 아이들은 유아에서 머물지 않는다. 그 아이들은 성장해서 어른이 될 '사회적 인간'이라는 점이다.  엄마는 문법적 구성이 다 무너진 문장과 어눌한 발음과 엉망진창 명확하지 않은 중국어로, 보모가 키우는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아빠는 칭글리쉬(중국식의 영어)를 쓰며 기초적인 문장으로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 집에서 엄마 언어인 한국어는 거의 없었다. 아이들은 당연히 한국어는 세 살 수준에 머물러 있고, 영어도 중국어도 뭐 하나 깊은 사고가 가능할 정도의 발달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중학생 고등학생인 그 아이들은 당연한 말이지만 학습에도 어려움을 겪는다. 부모와의 깊은 소통조차 불가능한 아이들은 당연히 또래 아이들과 사회적인 관계를 맺는데도 어려움을 겪게 된다.

 

  간혹, 국제결혼을 한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말이 느리다거나 언어적 어려움을 겪는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물론 아이들마다 타고난 언어 능력이 다 다르기에 어느 정도의 속도의 문제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만 해도 나는 언어를 쉽게 배우는 사람은 아니다. 말보다 듣는 것이 빠르고, 적거나 읽는 것이 말하는 것보다 더 빠르다. 처음 보는 이에게 낯을 가리고 분석하길 좋아하는 내 성격 탓인 거 같다. 하지만 아이의 언어라는 것은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천천히 자연스럽게 스며들듯 배워지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엄마 아빠가 쓰는 말이 다르다고 해서 그 아이가 언어적 장애를 겪는다. 이건 부모의 무지가 낳은 결과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엄마는 엄마의 언어를, 아빠는 아빠의 언어를 하다 보면, 아이는 자연스럽게 두 가지의 언어를 습득한다. 이것은 어쩌면 국제결혼의 최대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엄마는 엄마 말만, 아빠는 아빠 말만 하면 부부는 어떻게 소통이라는 것을 하며, 문제가 일어났을 때 어떻게 대화로 풀어나갈 것인가? 아이는 부부가 같은 언어로 의논하고 합의까지 이루는 과정을 보지 못하고 성장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간혹 '아이가 통역해줘요'라고 하는 사람들도 만나기도 하는데, 이 무슨 어이없고 염치없는 자랑인가 싶기도 하다. 아이는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순 없다. 마찬가지로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부모의  통역원이 되기 위해서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모든 대화가 행복하고 기쁘고 사랑스럽다면 다행이지만, 어떻게 사람이 사는데 그것만 있을까? 불쾌하고, 역겹고, 때론 더럽고 치사하고, 아이들이 알아서는 안 되는 부부와 어른의 문제도 있기 마련이다. 그 모든 것을 아이에게 의지하고 중간에 아이를 놔두고 통역원으로 쓴다고? 말도 안 된다. 그건 일종의 학대다.  

 

  언어가 통하는 사람들만 사랑에 빠지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랑에도 노력이 필요하다. 언제까지나 텔레파시와 몸의 언어로 사랑을 할 것인가? 더구나 가정을 이룰 거라는 생각을 가지면 그때부터는 노력을 해서 그 가정을 만들어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서로가 같이 노력해야 한다.  상대방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속에 깉들여 있는 문화까지 같이 배운다는 뜻이다. 그리고 서로를 존중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중국에 살고 있다고 해서, 중국인이 한국어를 배울 필요가 없다는 것은 더더구나 말이 되지 않는다. 그 결혼은 시작부터 불공평하다.  외국인과 결혼을 했다고 해서 그런 희생까지는 감내할 필요는 없다. 

 

  위의 부부로 예를 들자면 한국어를 할 생각도, 한국 문화를 알 생각도 전혀 없는, 스스로를 특별나게 여기는 그녀의 남편은 집안에서 된장찌개를 끓이면 그 냄새를 싫어해서, 그녀는 집에서는 먹을 수 없다고 했다. 왜 국제결혼을 한 자신은 특별난 존재라 여기면서 , 막상 자신의 남편에게는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일까? 그렇게 일방적으로 남편에게 자신을 맞추기만 하던 그 어떤 이는 가여워 보일 정도로,  늘지 않는 중국어, 영어 공부를 항상 했다. 물론 그 남편은 그녀의 애씀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그녀의 언어, 그녀의 문화를 알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어떤 이는 갈수록 이상해져 갔다. 남편과 깊은 대화가 불가능한 걸 알고 있는데, 자신이 얼마나 남편에게 일적으로(회사일) 많은 도움을 주는지, 어떤 날은 사람들이 중국인 남편들과의 (그때는 그런 모임이 있기도 했다. 지금은 있는지 모르겠다), 중국 시댁과의 문화 차이나 다름에 대해서 불평을 쏟아 내기라도 하면 '우리 남편은 안 그래'라는 말로 철벽을 쳤고,  심지어 남편과 문화와 예술에 대해서 토론을 하기도 한다는 이상한 말도 했다(텔레파시로 하는 건가? 그들은 별나라에서 왔나? 싶은 혼란도 가져다주었다). 그 어떤 이는 늘 남편이 얼마나 자신에게 잘해주고 있는지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굳이 굳이 말해주었고, 남편이 회사에서 얼마나 가치가 높은 사람인지, 가지도 않은 유럽 여행이나, 남편의 해외 파견 근무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결정적으로 내가 그 어떤 이와 더 이상의 만남을 지속하기 힘들다는 결론을 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집으로 나를 초대하더니 , 며칠 있으면 유럽에서 산 그림이 올 거라며 나에게 자랑을 했고,  무려 그 그림이 '피카소' 그림이라고 했다. "카피라는 거죠?"라고 묻는 나에게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아니, 진품이지 물론"이라고 하는 순간, 아 이제는 정말 만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 어떤 이가 나에게 던진 "내가 국제결혼을 한 것처럼 생겼데"와 더불어 "피카소 그림이 며칠 있다가 배달되어 올 거야"라는 두 문장이 맴돌았다. 

  그녀가 그전부터 가끔 이상하긴 했었다. 막 결혼하고 직장을 다니고 있던 나에게 주말에 어느 화가의 그림을 예약해놨다며 같이 보러 가자고 했지만, 막상 가보니 화가는 없었고 그림만이 몇 점 있었다. 가격을 묻는 그녀에게 화실 직원은 6만 원(1000만 원)쯤 되는 돈을 이야기했었고 예약을 해놔서 가져오기만 하면 된다고 했던 그녀는 과감하게? 돌아서서 오늘은 별로네 이러고 돌아온 적도 있었다.  가끔 가는 친정에(한국)는 아이들과 남편을 데리고 가지 않았고, 그 어떤 이가 막 결혼을 했을 무렵, 그녀의 친인척들은 중국인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모른다고도 했다.  이유는 아직까지 중국인에 대한 편견(?)이 있어서라고 했다. 아이를 호적에 올리는 문제도, 아빠가 중국인이니 무조건 중국 국적을 주어야 한다고 했지만, 다시 맘을 바꾸어 한국에서도 호적에 올려야겠다 했는데, 아빠 성이 중국인인 것이 확연히 드러나는 성이라서, 자신의 성을 준다고 했다 (# 이 점은 내가 대부분의 한국 여자들을 이해할 수 없는 포인트 이기도 한데, 중국으로 시집왔으니 모든 것을 중국식으로 맞춰 사는 그녀들은 한국에서 아이들을 호적에 올릴 때 남편의 성을 주지 않으려고 한다. 왜 내가 한 선택에 당당하지를 못할까?  대부분 엄마의 성을 따르는데, 왜 그럴까? 물론 우리 아이의 성은 중국어 발음 그대로 '리우'이다)

 

 아무튼 그 어떤 이의 아이들은 엄마의 성을 앞에 달고 외국인으로 외국인들이 다니는 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고, 같은 생활권에 있느라 간간이 들리는 그녀와 그녀 아이들의 일들은 그리 유쾌하거나 즐거운 일들이 아니었다.  어쩌다 마주치는 그녀는 확연히 드러나는 가짜 액세서리와 가짜 명품으로 온몸을 감싸고 다니거나, 긴 머리를 치렁이며, 나를 모르는 척하고 지나가고, 40도가 넘어가는 어두운 여름밤에 긴소매 옷을 입고, 창이 넓은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를 장착한 채로 동네 슈퍼에 나타나기도 했고,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유령이나 그림자처럼 스르륵스르륵 표류하듯 다녔다.  본인이 국제결혼을 할 만큼 특별나다고 당당하게 말했던 그 어떤 이는 혼자만의 섬 혹은 성 안에서 스스로를 가두고, 스스로의 생각안에 갇혀 지내는 듯했다. 그녀가 어떤 생각으로 가정을 이루고 (그것도 파트너와의 팀워크가 배로 필요한 국제결혼을), 남편과 살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확실한 것은 그녀는 결혼을 통해 확실하게 이루고 싶었던 목표(중국 부자와의 결혼?  한국에서는 가질 수 없었던 상류층의 삶? 등등)가 있었음이 분명한데, 그것을 채우지 못한 욕구불만 상태라는 것이다.  그 어떤 이는 만나는 이마다 사소한 거짓말에 또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말을 숨기기 위해 사람들을 피하게 되고, 그것이 악순환이 되고, 반복되어, 사람들과의 인연을 이어나가지 하고,  감정 소모를 하고 있는 사이 그들의 가정 안의 두 어린 영혼도 엄마가 차단한 한인 사회에서 소외되고, 그렇다고 중국인 커뮤니티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로, 친구를 사귀지 못하고, 이 학교 , 저 학교를 이리저리 떠돌며 어떠한 언어로도 사람들과 깊게 소통하기가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어떤 이와 아이들은 그녀의 말대로 특별나 보이기는 했다.  

  


  나의 결혼 생활도 이것저것 문제가 많기는 하다. 나는 남편과 감정적 공감대를 이루어 내기가 힘들고, 남편도 나도 장남 장녀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둘 다 고집이 세고, 주장을 굽히기를 힘들어해서 자주자주 부딪힌다.   아이는 가끔 '엄마 아빠 둘 다 똑같다'며 혀를 끌끌 차고,  어쩔 땐 서로 삐져서 몇 주씩 말을 안 하기도 한다.  그러나 남편은 나의 언어를 내 집에서 말해주고, 나도 여기서 살면서 남편의 언어를 하지 못해 그에게 매달려 있진 않는다. 우리는 처음 만남부터 서로의 언어를 못해 제 삼의 언어로 이야기를 했고(영어),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나의 언어를 나는 그의 언어를 하면서, 복닥거리면서 살고 있다.  싸우고 화나고 빈정 상하는 일이 많지만, 남편은 내가 한 국적 불명의 음식(한식에 가까운 중식이나 양식이라고나 할까)을 잘 먹어주고, 아니 너무 악착같이 챙겨 먹어주고, 아이는 엄마와 엄마의 언어로, 아빠와 아빠의 언어로, 그리고 우리들만의 언어로 이야기를 한다.  우리는 특별난 사람이라 이 결혼을 한 것이 아니다.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다. 살다 보면 이 사람이 중국인이지 한국인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이의 정체성도 딱히 중요하진 않는 것 같다. 아이는 중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그저 "우리의 아이"일 뿐이고,  우리는 가족일 뿐이다.   그러나 남들과는 조금 다른 출발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한쪽의 희생이 따라서도 안되고 "같이" 노력해야 한다. 만약 나의 여동생이나 남동생이 국제결혼이라는 것을 한다면 물어볼 것이다. 

  

  " 노력할 준비가 되었니?  상대방도 너도 둘 다 서로를 이해하고 참고 견디어 낼 준비는 되었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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