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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파견 3호

by 블랙홀

첫 발령 7년을 못 채우고 사직서를 낸 후 교직이 천직임을 알고서야 임용고시로 새 발을 딛던 때가 엊그제 같다.

그때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정말 행복했는데ㆍㆍㆍ


교직에서 아이들만 바라보며 일평생 평교사로 지내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은, 경력이 쌓이고 나이가 들면서 나타나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인 것 같았다.


아마도 경력이 낮은 교사들은 내가 말하는 게 전혀 실감이 안 날 것이다. 최소 40대 중반 이상의 교사들은 공감이 되는 부분이 충분히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떠들썩하던 출발과는 달리 해가 갈수록 시. 도에서 5인이었던 수석교사의 인원은 점 점 늘어나기 시작했고, 관리도 도교육청이 아닌 지역교육청에서 하다 보니 그 입지도 깊지 않았다.

퇴직 시까지 수석교사에 대한 법적 신분보장도, 불분명한 초기 제도의 부작용도, 교내 상급자들의 이해도도 많이 부족했다.


난 수석교사를 더 이상 희망하지 않았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도 시들해졌다. 떠도는 난민처럼 흔들리면서 또 다른 돌파구를 찾기 시작했다.






젊은 후배들은 도교육청 파견교사를 희망했지만 난 순수하게 행정직만 있는 교육원에 특별파견 3호로 그렇게 도망가듯 파견 나갔다.

50~60명이 근무하는 교육원은 모두 일반행정직이었고, 교사 신분은 달랑 나 혼자였다.

그곳에선 선. 후배들과 부딪치지 않아도 되고 수업도 하지 않는 일반행정과 같은 일을 했다.


주어진 예산에 맞게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강사와 수강생을 섭외해서 운영을 하며 예산의 결과물을 내놓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배치된 부서는 5급 부장과 6급 실장, 그리고 7.8.9 급이 어우러져 10여 명이 근무하는 곳이었다.

회사처럼 책상이 파티션으로 삼면에 가림막이 설치된 채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만 하다가 퇴근하고 출근하면 됐다.


출근이 조금 늦어도 크게 눈치를 보지 않았고, 주어진 시간 안에 담당 일만 처리하면 되니 적당히 느슨할 때도 있었다. 한바탕 난리를 치며 일을 마감할 때도 있었다.


출장도 잦아 서울, 대구로 외박을 하기 일쑤였다. 축제장을 찾아 부스를 운영하고 벤치마킹해서 가져오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구내식당은 있었지만 점심시간엔 인근 맛집을 순회하며 벚꽃의 화려함이, 풀섶의 민들레가 눈에 보일만큼 여유로움도 되찾았다.

난 내가 교사라는 것도 잊고 금세 그들 속에 동화되었다.


단점이라면 연간 예산을 세웠어도 운영할 때마다 결재를 받아야 했고, 결과물을 낼 때도 예산 사용처를 건건마다 결재를 받아 보관해야 했다.


학교의 행정실이 해야 할 일을 교육원에서는 모두 스스로 해야 했기 때문에 1원의 오차라도 있으면 야근을 해서라도 밝혀내야 하는 것은 고역이었다. 부족금을 메운다고 해도 결재라인에선 수치가 맞지않음 결재 자체를 올릴 수가 없었다.

숫자 계산에 젬병인 내게는 1원, 10원 때문에 야근을 하는 일이 많았지만, 적어도 내게 평가를 받던 이들이 어느새 앞서 나간 눈꼴 시린 일은 보지 않아 좋았다.





어쩌면 종착역이 될지 모르는 교육원에서 행정공무원과 같은 일을 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나 역시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융통성이 필요한 일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고, 심각하다고 느끼는 일은 대충 넘어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물과 기름이 섞일 수 없는 것처럼 이질감을 느끼곤 했다.


그러면서 난 내가 제일 싫어하던 꼰대로 변해가고 있음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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