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화양연화

by 블랙홀

하루하루 지날수록 난 더 용감해졌다.


봐줄 사람은 없었지만 스스로 가꾸지 않고 푹 퍼진 생활을 하면 가치(?)도 떨어진다고 생각해서 관리하는 걸 게을리하지 않았다.

누구를 만나 든, 어디를 가든, 제일 먼저 보는 게 외모이니 그 역시 신경을 썼다.


몇 년째 비만클리닉을 다녔지만 그래도 요요는 왔다.

셋째 출산 이후 더 아이를 낳지 않으니 몸매는 흐트러질 일이 없었지만, 바지 허리가 꽉 조인다든가 거울 속에 비친 옆모습이 D라인으로 변하려 하면 죽어라 다시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딸은 친정엄마를 닮는다고 했다.

우리 엄마는 80킬로 이상의 몸매를 유지하셔서 옷을 사려면 특대가 아닌 별대, 사이즈로 치면 4xl 입어야 해서 쉽게 옷을 구하지 못해(지금에야 해외직구가 있지만) 남대문 수입상에서 옷 하나를 사면 낡아 떨어질 때까지 입으셨다.


안 해 본 다이어트가 없을 정도로 그 분야에선 도사가 되었지만 자신을 컨트롤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


지방흡입술로 기본 적인 몸을 만든 후, 후속관리를 하는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오일을 바른 후 건식 사우나에서 몸에 있는 수분을 쥐어짜자기도 하고, 하루 세끼 맛없고 거칠거칠한 생식으로 버티기도 했다.

한의원에서 한약을 지어먹고, 귀와 복부에 주기적으로 침을 맞기도 했다.

복부의 지방을 없애기 위해 레이저를 쏘기도 했고, 자면서 살을 뺀다는 수면다이어트도 해봤다.


하지만 가장 효과를 본 것은 병원의 비만클리닉이었다.





비만클리닉은 의사의 처방이 있어야 약을 받을 수 있었고, 2주 이상은 약을 주지 않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딸의 이름을 도용해서 한 달치씩 받아왔다.

처음엔 하루 한 번 먹었지만 나중엔 담당실장을 졸라 하루 두 번으로 늘렸다.


실장은 약 성분 중의 하나는 한 달을 먹으면 일정기간 쉬었다 다시 먹어야 한다고 우려했지만, 임신 중 80킬로 가까이 늘었던 때를 떠 올리며 어떻게든 약을 받아왔다.

그렇게 10여 년 이상을 거르지 않고 꾸준히 먹었다. 마치 보약처럼.

약이 떨어지면 초조하고 불안해서 일상생활을 하기가 힘들었다.

약을 지을 때마다 병원에선 일정기간 쉬라고 난색을 표현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약을 먹으면 기분이 Up 되어 종일 붕붕 떠 있다가, 약 기운이 떨어지면 Daun 되기를 되풀이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감정의 기복이 심해져 예민해지면 사람들과 싸움을 하고 다녔다.


신나는 음악이 나오면 누가 있거나 없거나 스텝을 밟았고, 집에서도 이런 행동은 변하지 않아 주책이라며 눈을 흘기는 아이들 손에 이끌려 주저앉곤 했지만 내 기분에 따라 살았다.


차 안에는 트롯부터 라틴까지 CD가 수두룩하게 늘어났다.

비가 오는 날이면 최 00의 '낭만에 대하여'를 틀어놓고 눈물을 찔끔거렸고, 화창하면 리키마틴의 노래를 볼륨 껏 높이곤 차장밖 바람을 만끽하곤 했다.

밥 먹듯 과속을 하면서도 추월은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추월하는 차를 보면 쫓아가서 칼치기로 끼어들어 진로방해를 하곤 했으니, 지금 같았으면 경찰서를 내 집 드나들 듯했을게다.

가끔은 진짜 임자를 만나 문신오빠가 쫓아오면 죽어라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을 가기도 했다.


다이어트 약을 먹으면서 없었던 불면증이 생겨 다시 내과에서 불면증 약을 처방받아먹었다.

복용하는 약이 자꾸만 늘어났지만 그 심각성을 그때는 몰랐다.

불면증이 다이어트약의 부작용인지도...... 하루에도 열두 번 변하는 기분이 약 때문인지 몰랐다.

불면증이 내과약으로 조절이 안될 만큼 내성이 생겼을 때, 신경외과나 정신과에서 불면증 약을 받아왔다. 그 부작용으로 만 24시간을 꼬박 잠에 빠져 들 때도 있었다.


훗날 그렇게 먹었던 다이어트 약이 마약성분을 띄고 있어 더 이상 병원에서 판매금지가 되고서야 그 약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하지만 약을 복용하던 중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발등을 찍게 된 결정을 한 것도 바로 그때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난 갯벌 한가운데에 있음을 알면서도 빠져나올 수 없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마치 코모도도마뱀이 먹이에 독을 주입한 후 서서히 즐기면서 뜯어먹고, 독에 중독된 먹이는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도 팔다리가 끊어져 나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약을 먹으면 온 세상을 가진 듯 풍요(?)롭고, 모든 것이 하찮아 보였다.

어느 장소를 가도 리더가 되지 않으면, 그대로 뒤 돌아 나왔다.

뭐든 눈에 띄게 행동했고, 눈에 띄어야만 만족했다.

마음 닿는 대로 생각하고, 마음 닿는 대로 행동하고, 마음 닿는 대로 돌아다녔다.


주변에 여자 친구보다 남자 친구들이 많아졌고, 난 사람들을 끌고 다녔다.

그 층도 다양해 대학교수, 자영업자, CEO, 정치인, 금융인, 역술인, 경찰대교수, 왕년 손가락으로 상대 눈알을 뺏다는 조폭오빠까지 두루두루 만나봤다.

만났다는 것은 말 그대로 만남이지 모두 끈끈한 관계는 아니었다.

주로 공을 치다가 알게 된 사람들이었고, 한 사람을 알면 주변인을 소개해 주니 밥 한 번 먹을 때마다 만남의 폭이 넓어진 것이다.


그 나이라면 모두 가정을 지닌 나이들이고, 모두 끈끈한 관계였다면 벌써 여러 집이 사달이 나서 아마도 뉴스 헤드라인의 1면을 장식했을지도 모른다.


나이는 12살 위부터 18살 연하까지 다양했다.

사실 부모님이 주신 것 중 가장 잘하신 것은 또래 나이 친구들보다 조금 젊어 보이는 얼굴과 관리한 만큼 몸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나이가 있다고 노땅도 아니었고, 연하라고 해서 풋풋한 것도 없었다.

물론 그중에는 이성으로 끌리는 사람도 몇 명 있었던 걸 사실이다.






그 사람은 직장에서 출장을 갔던 곳의 주인장으로 띠동갑 연상이었다.

처음 만남에서 자신을 소개하며, 진지한 관계를 하고 싶다고 의사를 밝혀 왔다.

유부녀인지 돌싱인지는 어떻게 알고 들이대냐고 빰따구라도 때렸을 텐데, 그 사람은 지난 내 과거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가정부와 운전기사가 있어 살림에서 해방될 수 있었고, 원하는 때 원하는 곳으로 해외여행을 보내준다고 했다.

12살 띠 동갑은 궁합을 보지도 않을 정도로 좋다고 했으며, 우리 애들도 모두 거두어 준다고 했다.

그 남자의 장성한 아들은 아버지의 그늘에 있었던 만큼 눈치를 보느라 아버지의 사적인 일에 끼어들지 못했다.


첫 만남에서 내가 아닌 친청아버지의 선물을 준비해 줘서 의아했지만, 그만큼 상대방의 심리분석에 탁월한 사람이었다.


몇천 평의 개인박물관을 지어놓고 풍수지리가로 해외를 밥 먹듯 다닌다던 사람이었다. 우리나라 월간지에 풍수의 대가로 전직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이 표지를 장식할 만큼 국내. 외에서 유명하다고 했다.(대통령과 찍었다는 월간지만 봤지만)


사춘기로 마음을 잡지 못하는 막내를 자기가 맡아보겠다고 손을 내밀었지만, 그 말을 듣고 질색팔색한 막내가 내 휴대폰을 변기에 던져버리고 엉엉 울어퍼 질러대는 통에 세 번의 짧은 만남은 그렇게 끊어졌다.


남자는 다시 만날 수 있지만 자식을 잃으면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내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한번 노출된 사생활로 아이들이 싫어할 행동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이들의 양육권을 가져온 만큼 책임도 내가 져야 했다.


내 철칙은 아무리 달콤한 제안을 하고 능력이 있어도, 내가 초이스를 해야 밥이라도 술이라도 먹을 수 있었지 남자들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았다.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은 나도 갖고 있었고,

그 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나 스스로도 할 수 있었으니,

굳이 그 사람의 마음에 들려고 하지 않았다.

관계를 유지하려면 알아서 끌려올 테고, 튕겨져 나간다고 아쉬워하지도 않았다.


다이어트 약의 무서운 성분을 탓할 수도 있겠지만, 덕분에 정말 후회 없는 삶을 경험했던 그때가 내 인생의 화양연화였다.


그래서인지 지금 이 순간 인생이 끝난다 해도 미련이나 후회는 없다.


그저 인생은 잘 놀다가는 소풍과 같고...... 난 원 없이 소풍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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