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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첫매듭 Mar 18. 2023

누군가의 장난은 어떤 이의 공포가 된다.

<더 글로리>를 보고

최근에 핫하다는 <더 글로리>를 보았다.


<더 글로리>를 보면서 느낀 점은 마치 '공포영화'처럼 무서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공포영화 중에 '무서운 장면 없이 무서운 영화'라는 문구의 영화처럼 아마 그런 일을 겪은

피해자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그때 겪은 공포가 흉터와 트라우마가 되어,

평생 동안 살면서 문득문득 아니 매 순간 아픔에 어쩌면 몸부림칠지 모를 일이다.


학폭이란 단순히 폭력뿐만 아니라 폭력은 없지만 왕따, 은따 등

상대방에게 모욕과 상처를 주는 모든 행위를 일컫는다.


필자가 어렸을 당시에도 학폭과 왕따가 없지는 않았지만 단순히 폭행이나 금품갈취(?) 정도에

그쳤지만, 시대가 발전하고 인터넷방송이나 유튜브 등 얼마든지 정보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있기에

좀 더 자극적이고 상상도 하지 못한 방법으로 괴롭히는 방법을 터득한다.


세상이 발전했기에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산속에 들어가서 살지 않는 한)

기술과 정보의 발전은 개인이 막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필자만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우리가 어렸을 적엔 어떠했는가?

학원에 다니는 학생들보다 놀이터에서 놀거나 태권도장을 가는 등 몸을 쓰고 운동을 하지 않았나 싶다.


학창 시절에는 학생들이 하루의 절반을 학교에서 보낸다.

그렇기에 부모보다 또래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더 많고 그걸 다른 말로 하면

학교 내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같이 보내는 시간이 더 많다는 것이다.


학생들과의 일에서 어른이 나서서 해결되기란 솔직히 불가능에 가깝다.

어른이 학생을 계속 따라다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피해자들은 어떻게 그 상황을 모면해야 할까.

사실 여러 명이 맘먹고 괴롭힌다면 벗어날 방법을 찾기는 쉽지 않다.


학창 시절엔 법보다 주먹이 우선이기 때문에 운동을 하여

몸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몸을 키우거나 운동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쉽게 건드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는 공부 혹은 개인사정이 있을 수 있기에

이것도 쉽진 않지만 그렇다고 묵묵히 당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학생들의 세상은 '학교와 학원 그리고 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인과는 다르게 그 좁은 세상이 전부라고 믿고 살아가는 학생들에게,

그들이 하루의 반을 고통 속에서 살게 된다면

아마 그 세상을 깨고 나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 어른의 노력도 매우 중요하지만

학생이 그런 일을 겪지 않게 혹은 이겨낼 수 있도록

사회전반적인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영악한 애들은 교묘하게 악행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피해받는 학생을 단순히 상담뿐 아니라 자신을 보호할 수 있도록

운동(혹은 호신술)을 지원해 줘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p.s <더 글로리>처럼 시원한 복수극이. 권선징악이 되는 일이 세상에 옳은 일이지만

현실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태반이다.

가해자는 잊고 살아가지만 피해자는 잊어버리고 싶어도 잊어버릴 수 없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너무 많은 꽃들이 피기도 전에 져버린다.

꽃이 피기도 전에 지는 상황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꽃에게 한마디 하고 싶다.

'너희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너희들 스스로가 충분히 밝고 소중한 존재이기에.

삶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명은 지속(持續)이다. 끊이지 않고 끊어졌다가도 다시 잇는 것이 생명이다. 지지 않는 것이 이김이다. 져도 졌다 하지 않는 것이 이김이다. 놓지 않는 것이 이김이다. 놓지 않는 것이 믿음이다. 살려니, 되려니 하는 것이 믿음이다. 없어도 믿는 것, 없으면 만들기라도 하자는 것이 믿음이요 그 믿음이 생명이다. ㅡ함석헌(咸錫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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