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내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게 아니고서야

by 김경리

사실 내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글이 나를 통해 세상에 오는 것이다.


정말 ‘내가’ 글을 쓰는 것이라면

언제든지 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아니고서야

지금처럼 일이 모두 중단되어

춥고 쓸쓸한 계절을 맞이하고서야

비로소 글이 써질 리가 없다.


내가 물건을 가진 것이 아니다.

물건이 나에게 머무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금이 가버린 낡은 찻잔이나

시간이 멈춘 지 오래된 손목시계 따위를

아직도 버리지 못할 리 없다.


내가 아픈 것이 아니다.

통증이 나를 지나가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제는 뒷머리가 뻐근하고

오늘은 속이 거북한 까닭을

이토록 깜깜하게 모를 리 없다.


내가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추억이 내게 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많은 시간 중에서 일부만

선명하게 때로는 악몽을

때로는 그리움을 남길 리 없다.


내가 기쁜 것이 아니다.

기쁨이 나를 통해 드러난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세상에 슬픈 일이 이렇게 가득한데

모처럼 나온 파란 하늘이나

통통 걸어가는 참새의 몸짓 하나로

이렇게 웃음이 날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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