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게 하는 것

죽은 눈으로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마주친 것

by 김경리

나를 살게 하는 건
화려한 꽃바구니가 아니다

유행하는 가방이나 장신구도
널리 알려진 자기 계발서 구절도
비싸고 진귀한 음식도 아니다

나를 살게 하는 건
죽은 눈으로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마주친 것이다

네모반듯한 보도블록 틈에
홀로 비집고 나온 것,
유난히 추웠던 지난겨울에
수없이 눈이 내리고
얼었다 녹기를 반복한
차가운 길 위에 어떻게든,
보란 듯이 자라난 한 포기 풀이다

사람이 만든 길 위에
무수히 깔린 보도블록의 역사보다도
더 넓고 더 깊고
더 질긴 생명이,

세피아톤의 세상에
실수로 떨어트린 물감처럼
선명한 초록색이
마음의 어둠을 몰아낸다

나를 살게 하는 건
더는 기쁘지 않은 생일날에
친구가 써 준 손편지이며
사랑하는 이의 포옹이며
할머니가 구워주신 노란 고구마다

악몽에서 깨어나 창을 열었을 때
뺨을 비추는 햇살이며
몸을 감싸는 신선한 공기다

울고 싶은 날
시원하게 쏟아지는 비이며
별로 유명하지 않지만
마음을 다독이는 노래 한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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