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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leis Jul 04. 2023

사물의 소멸과 피아노와 시

'피아노는 하나의 시야. 피아노는 하나의 바디를 만드는 일이야.'


아침에 일어나 커피와 함께 아보카도 햄치즈 샌드위치를 먹으며 책을 읽었다.


무언갈 먹을땐 종이책보다는 이북, 세워져있는 아이패드로 읽는 게 편하다.


최근 구매한 한병철님의 책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북이라 그런지 몰라도, 먹으면서 읽어서인지 몰라도) 책의 내용이 잘 들어오지 않는 편이다. 한병철님의 책은 철학책 치고는 쉽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철학책이라 막 쉽진 않다. 일정부분 포기하고 그저 눈을 움직였다.


오늘 내 눈길을 끌었던 부분은 시에 관한 부분이었다. 평소 나는 그저 시란 알수없는 어떤 개인적인 토로 정도로 여겨왔던 것 같다. 에밀리 디킨슨을 좋아하고 한 때 자크 프레베르를 즐겨 읽었을 뿐이다. 그 둘의 시는 그닥 어렵지 않았다. 어려운데 아름답고 알수있을 것 같은 느낌이 있었기에.


좋아하는 시들을 읽을때 그것들의 하나하나에는 어떤 느낌표가 숨겨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하는 느낌 말이다. 그것때문에 좋아해왔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모호함이 개인적인 기호에 의해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 맘에 들었다. 모든걸 하나하나 세세히 묘사하는 소설들보다 그 점이 더욱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맹세코 시가 수작업이라곤 생각해본적이 없다. 어떻게 시가 수작업일수 있는가. 머릿속으로 구현해 내는 것이 수작업이라고? 한병철님의 책에서는 그것이 수작업이라고 말한다. 사물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그 책의 제목은 '사물의 소멸'이었다.(나는 보통 제목을 신경쓰지 않고 읽거나 본다. 그렇기에 잘 기억해내지도 못한다) 한병철님의 책 <사물의 소멸>에 나오는 부분을 보자.


예술품은 사물이다... 릴케는 루 안드레아-살로메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쓴다. "어떤 식으로든 나도 사물들을 만드는 경지에 이르러야 합니다. 조형된 사물들이 아니라 쓰인 사물들 - 수작업에서 나오는 실재들."


어릴적 아빠의 지인중에 조형 예술가가 있었다. 그분은 사물을 만들었다. 사람들, 사람들간의 관계를 둥글고 매끄러운 형태의 어떤 상으로 만들어내었다. (그분은 내게 신한 물감세트와 화홍 붓을 선물해주었다. 그것은 어린이에겐 과분한 퀄리티와 갯수였다) 그 조형들에 큰 감흥은 없었지만 내가 평소 감탄해 마지 않았던 시들은 지금 생각하면 어떤 바디감이 있었을지 모르겠다. 바디감, 그것은 무엇인가. 만져질것 같은 무엇, 알수없는 힘, 생동감, 사물이 대신하는 생각과 감정의 복합체들, 감각을 통한 완성된 무언가.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실제가 되어버리는 그림. 유혹적인 무언가가 되어버리는 것


또하나 주목할 수 있는 부분은 이 부분이다.


읽기는 해석학이 아니라 촉각학, 만지기, 애무하기다. 읽기는 시의 피부에 밀착하고 시의 신체를 향유한다. 신체로서의 시, 사물로서의 시는 특별한 '여기 있음' 을 느끼게 해준다.


책을 읽다가 세탁기에 넣어둔 빨래가 다 되기 전 몇 분의 시간이 남아 피아노앞에 앉는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친다. 아침의 공기속에 떠다니는 음표들, 하나하나 충실하게 눌러보니 평소와 소리가 다르다. 아침의 피아노란 이렇게 좋은 것이구나. 잠시 천국에도 피아노가 있을까, 뜨개질이 있을까 생각해본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없다면 그것이 천국일까. 천국보다 힘들어도 인생이 낫지 않나. 별별 잡생각을 떠올리며 건반을 누른다. 아마추어이기에 그래도 상관없다. 손은 어느새 틀린 음표를 마구 찍고 있지만 다시 치면 그만이다. 도저히 상념을 멈출수 없고 멈추고 싶지도 않다. 그것은 내가 피아노연습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중 하나이다.


어느새 나는 내 손, 피아노 건반을 누르고 있는 손을 본다. 오늘 피아노로 이끌린 것은 한병철씨가 글쓰기와 피아노 사이를 왔다갔다한다는 데서 영감을 받은 결과다. 그러기에 손으로 하는 일을 강조한 그의 생각에 물들어 나는 내 손이 하는 일을 가만히 지켜본다. 손이 건반을 더듬는다. 마음이 떨린다. ‘나는 여기에, 현재에 있다.'..손이 음악을 만드는가, 생각이 음악을 만드는가, 음악을 해석하는 것은 내 정신이지만 그 일을 실제 음악으로 들리게끔하는 것은 내 손이다. 음악은 바디일 수 있는가. 어쩌면 피아노는 바디인가. 어쩌면 피아노는 시인가.


여태껏 피아노 악보를 해석하면서 무의식적으로 그것이 어떤 서사이고, 이야기라고는 생각해왔다. 그리고 바흐같은 경우, 나는 그것이 대화처럼 들릴때가 많았다. 그러나 피아노는 시일 수 있는가.


피아노는 시일수 있다. 아니 그것은 시이다!! 모호함, 알수없음, 감춰져있음, 그리고 있으나 그려놓지 않음, 시간성, 연주자가 매개가 되어야한다는 점, 즉흥성, 그 모든것이 피아노를 시로 만든다. 나는 그동안 피아노를 서술적으로만 접근했기에 그저 쳐내려갈뿐 하나의 그림을 그려내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 그것이 만들어내는 바디는 분명 나를 홀리고 있었지만 좀 더 만져질 것 같은 느낌을 내지 못했던 것은 그 때문일까.


아마도 오늘 이후로 치는 피아노는 조금 더 특별해질지도 모르겠다. 나는 바디를 가진 무엇과 교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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