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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leis Jul 04. 2023

David Bowie - Blackstar

"이제 나는 죽어가고 있으니 마침내 애꾸눈, 아니면 눈이 아예 없는 형상으로 남게 될 것이다." - 앙드레 지드, <쇼팽 노트> 


눈.


언젠가 꿈에서 나는 엄마의 죽음을 목격하고도 전혀 슬퍼하지 않고, 헐렁한 누더기 차림으로 전사처럼 당당하게, 엄마의 시체에서 한 쪽 눈알을 뽑아들고 그걸 내 왼손에 넣은 채 언덕을 넘어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었다. 깨어서도 슬프지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다만 왜 눈알을 왼쪽 손에 넣고 간거지 하는 의문.


그 다음날 꿈에선 급기야 내가 앉은 채로 죽어있었는데, 역시나 아무렇지도 않고 슬프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오히려 약간의 기쁨이 섞여있었다. 왜냐면 그 장면을 보며 내가 육신을 벗었고 그건 그냥 껍데기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휴식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모든 꿈을 꾸기 전에 며칠동안 일련의 사건들이 있었다.


길거리를 가다가 쥐인지 모를 어떤 작은 동물의 시체가 내 발걸음 한 가운데 있는 걸 목격했다.

그리고 어디에선가 또 죽어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결정적으로 딸과 함께 마트에 가는데 하필 우리가 건널 신호등 옆 가로등에 엄청나게 큰 갈매기가 날개 한쪽이 걸린채 마치 옆으로 날듯이 두 날개를 펼치고 죽어있었다. 무서운 광경이었다. 무슨 계시처럼도 느껴졌다. 신호등은 좀처럼 바뀌지 않고 차들은 아무일 없다는 듯 쌩쌩 달렸다. 주위의 아무도 그것에 신경쓰지 않았다. 노을이 지기 시작한 하늘에 우리쪽으로 몸을 펼치고 걸려있는 그 새는 마치 우리 눈에만 보이는 것 같았다.  '오, 정말 나한테 이러기야.' '이거 무슨 계시인가, 동시성?' 반복되는 죽음의 변주들로 말도 안되지만 나는 나때문에 그 일이 생긴것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동시성, 나는 그 즈음 이상한 일들을 겪고 있었다.

매일 아침마다 명상을 했던 시기여서일까.


아침에 꿈에서 깨기 직전 그날 트위터 알림에 뜰 숫자가 보였다. 그리고 그 숫자는 맞아 떨어졌다. 아무 생각없이 폰을 만지작거리다 꿈에서 본 그대로의 숫자가 떠있는 걸 보고 소름이 돋았다. (어쩌면 트위터를 너무 오래 한 탓인지도) 이런 일이 며칠간 이어졌다.


낮잠을 자려고 누워 호흡을 하면 유체이탈 영상에서 본 것처럼 나의 투명한 상체가 자고 있는 동안 스르르 몸을 일으켰다. 약 30도. 악 아직 안돼 하면 다시 몸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저 위의 나의 죽음을 맞이한 꿈을 꾸고 나서는

일생 처음인 것같은 편안한 호흡을 경험했다. 나는 자유롭다는 생각과 함께,

호흡이 밑으로 내려가 배가 들락날락하지도 않는 상태로 깊은 숨을 쉬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나는 죽어가고 있으니 마침내 애꾸눈, 아니면 눈이 아예 없는 형상으로 남게 될 것이다."


앙드레 지드가 일기에 쓴 이 글을 읽자마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데이비드 보위. 죽기전 마지막 앨범의 뮤직 비디오에서 그는 붕대같은 것으로 두 눈을 가린채였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엔 단추가 있었다. 그러고도 노래를 불렀다. 배경은 어떤 별인듯했다. 죽은 다음의 세계같기도 했다.


죽어가고 있으니 애꾸눈, 눈이 없는 형상으로 남게 되다니, 그 많은 신체부분들 중에서 왜 하필 눈일까?


앨범을 작곡하고 뮤직 비디오를 찍을 당시 데이비드 보위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가사와 뮤직 비디오의 많은 부분이 죽음에 대한 은유를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도 죽음과 눈의 소멸을 연결시키고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새로 얻은 눈으로 다른 세상을 보고 있는지도..)


나는 엄마의 눈알 하나를 빼들고 몸을 벗고 새로 태어나려 했나.

데이비드 보위의 단추 눈은 한 세계의 끝과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의 이행을 의미할 수 있을까.



https://youtu.be/kszLwBaC4S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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