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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leis Oct 13. 2023

화법

오후 5시쯤, 누군가 문을 세게 두드린다. 여기는 배달원 아니면 잡상인들이 자신있고 명확하게 문을 쾅쾅 두드리는 편이다.


시간상 배달원은 아니고 저 노크의 활달함으로 미루어 보아 분명 보험가입이라든가 기부를 권유하는 사람일 것이다.


하필 내가 아래층에 있어 문을 열어줘야 하는데 망설여지지만 문을 열어야 한다. 안 그러면 누구인지 확인할 길도 없고. 혹시 긴요한 일이 있을지도 모르고. 아들일 수도 있다. 분명 저 노크소리는 아들이 아니지만. 나는 잡상인에 대해 잘 대처하지 못한다. 서로의 시간만 축내는 타입이다.


문을 여니 활달해 보이는 백인 남자가 웃음을 가득띠며 말한다. "안녕하세요? 전 론이라고 해요. 혹시 동네에서 개를 데리고 다니며 훈련시키는 사람들을 보았나요?"


아~ 그쪽 계열 사람이구나. 동네에서 날렵하게 생긴 검은 개들에게 횡단보도 건너기며 길을 산책하는 법 등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특별히 남들에게 신경을 쓰진 않았다. 인사도 하지 않았다. 넓은 횡단보도 앞에서도 개들을 데리고 서너명이서 당당히 내 옆을 에워싸고 신호를 기다리던 그들이다. 굳이 그렇게 가까이. 그림자 인간이 된 기분의 나는 살짝 뒷걸음질쳐 그들 뒤로 자릴 옮겼다.


횡단보도를 건너서도 마찬가지로 길을 넓게 쓰며 걸어가는 그 당당함에 별로 호감은 안 갔지만 뭔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은 들었다.


"아, 네 가끔 봤어요." 나는 습관적으로 웃었다. 나쁜일하는 사람같진 않기도 했고.


"시각장애인 안내견을 훈련시키는 거예요. 그런데 수요를 따라가기엔 저희 기금이 부족한 실정이라... 신청자중 단 20퍼센트 정도만이 안내견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답니다. 터무니없는 숫자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오~ 나도 모르게 공감하는 표정을 지어버렸다. 왜냐면 정말로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 표정에 그는 자신감을 얻은 듯 했다.


"그래서 혹시 기부하실 의향이 있는지?" 그는 자신의 조끼에 씌어있는 단체 이름을 가리키며 거기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조끼는 형광 연두색이었다. 여기서 흔하게 봤던, 밖에서 일하는 분들이 많이 입던 그런 조끼와 비슷했다.


"음 혹시 안내책자같은 거 갖고 계시나요?" 나는 그의 얼굴과 조끼만 보고 결정할 순 없었다.


그는 약간 놀라는 눈치였다. 지금까지 아무도 그런 걸 묻지 않았다는 듯이.

"아니오. 그런 건 없는데.."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다.


"그럼 혹시 웹사이트 같은 거라도 있나요?.. 제가 좀 찾아봐야할 것 같네요... 전 이 단체에 대해 잘 모르거든요." 나는 기부할 생각은 있었다. 공돈이 좀 생겨서 안 그래도 기부할 곳을 찾고 있었다. 게다가 시각장애인을 위한 안내견이라면 괜찮았다.


그 다음 그의 행동은 예상밖이었다. 그는 자존심에 상처받은 얼굴로 몸을 살짝 옆으로 뒤틀었다.


"Okay. I'll leave you to it. (알아서 하세요). 우리 되게 유명한 곳인데. 안녕히 계세요." 그는 차가운 말투로 그렇게 말하며 돌아섰다.


"안녕히 가세요." 그의 뒤로 문을 닫으며 나는 내가 뭘 잘못했나 생각해보았다. 내가 너무 심각한 표정을 지었나. 내 주저하는 태도가 그를 의심했다고 느끼게 만들었나.객관적으로 내가 한 말을 되새겨 보니 그렇게 느낄수도 있었다. 서툰 영어로 최대한 기부할 의사가 있음을 전달하고 싶었으나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당신을 못믿겠으니 그만 돌아가시오가 된 것이다.


나의 화법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것인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슬픔이라고 하기엔 한국어로도 나는 비슷한 태도를 보였을 것이다.


나는 일단 기부할 의사가 있음을 밝히고 그 단체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요청한 후 그가 제시하는 기부방법을 순순히 따라야 했나. 아니면 이 동네 사람들은 그저 아니면 아니고 기면 기라고 딱 부러지게 말한 다음 주머니에서 현금을 꺼내 쥐어준단 말인가. 그의 조끼는 그럴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가.


한동안 우리집 문에 돌이라도 날아오는 것 아닌가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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