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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다 김 Apr 08. 2018

 Pain과 Suffering

요가 자격증을 따고 처음 요가를 가르쳤을 때의 설렘, 긴장, 흥분, 불안, 해냈다는 성취감, 그리고 버벅거린 순간의 창피함.. 등등의 온갖 복잡다단한 감정의 종합 선물 세트를 8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때의 시작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에 넘어질 것을 각오하고 일어서기를 반복했던 가치 있는 시간들이었다. 사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 대학교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가르쳤던 사랑 가득한 한국어 선생이었고 요가는 취미로 하고 있었다. 그 취미가 미국에 와서 직업이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인생이 어디 계획대로만 되는가? 때로는 길을 잃어 헤맬 때도 있고 컴컴한 터널 속에 있는 듯한 암담함을 느낄 때도 있지만 우연히 샛길에서 운명처럼 비니 요가를 만났을 때 나는 내가 가야 할 길이라고 결정했고 공부를 시작했던 것이다.  

 

아직 어두컴컴한 터널에 있었지만 터널 끝에서 보이는 희미한 불빛을 보았기에 그 불빛을 향해 8년을 걷고 걷고 또 걸어서 9년이 되어가고 있다. 아무도 없는 터널을 혼자 걸을 때면 외롭고 지치고 눈물을 흘릴 때도 있었지만 터널을 벗어나고야 말겠다는 자신과의 서약이 큰 태양과 맑은 하늘을 품을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초창기의 내 수업은 내 스승의 티칭을 그대로 카피(Copy)하고 매일 열심히 공부하여 지금보다 더 잘 가르친 것 같기도 하고, 부족했기에 더 열정적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미국에서 가장 큰 피트네스 센터에서 처음 요가를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경력이 쌓여 마침내 다섯 군데서 요가를 가르치게 되었고 9년이 되어가는 지금까지 변함없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니까 현재 개인 레슨을 빼고 다섯 군데에서 요가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내가 처음 시작할 때 보이던 얼굴들이 이사를 가지 않는 한 변함없이 내 학생으로 남아있어서 누가 선생인지 모를 정도로 요가 실력도 비슷하고 심리적으로도 많이 가까워져서 어려운 일을 서로 나누고, 기쁜 일들을 축하하고 여행 가면 여행 간다 알려주며 정보를 공유하는 친밀도 높은 요가 커뮤니티(Yoga Community)를 형성하게 되었다. 가끔은 시간 되는 몇 명이 모여 식당에서 맥주 한잔을 하면서 가정사도 서로 나눠서 누구 아들이 어느 주에 살고 있고 또 딸은 무슨 일을 하는지도 알게 되는 사이가 되었다.


눈이 소복소복 내리던 지난 겨울 요가원 웹사이트를 확인하지 않은 채 아름다운 설경을 구경하면서 천천히 차를 몰아 요가원에 도착하니 직원이 깜짝 놀라며 연락 못한 것을 사과하면서 눈으로 인해 수업이 캔슬되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다음 수업이 두 시간 뒤여서 이를 어떡하나 하고 고민하고 있던 차에 바로 차 한 대가 들어오는데 보니까 John이었다. 그 역시 요가원 웹사이트를 확인하지 않고 바로 나온 터였다.


John 은  올해 나이가 70인데 키가 크고 머리가 벗어지고 배가 많이 나와 뚱뚱한, 거인 같은 풍채에 붉은색 피부를 가진 미국 남자이다. 5년 전쯤 리타이어(retire)를 한 후 요가를 하겠다고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나타났을 때 과연 이 고급단계 그룹 (advanced group)에서 버텨나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는데 걱정과는 달리 어려운 동작들을 불평하지 않고 자기 몸에 맞게 변형해가면서 참을성 있게 잘 버텨주었다. 시간이 가면서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어가는 자신의 몸에 아주 흡족해했고 자신이 요가를 하고 있음을 아주 자랑스러워했다. 별일이 없는 한 거의 요가를 빠지지 않았고 이 요가 클래스에서 반장 노릇을 톡톡히 해 주었다. 땀을 뻘벌 흘리며 요가하는 그의 모습을 볼 때면 그에게 요가를 해야 하는 절대적 이유가 있어 보였는데, 그가  스무 살 정도 차이가 나는 아내와 살고 있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어서 알게 되었다.

 

눈이 오는 아침에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 두 사람이 찾아간 곳은 가까운 스타벅스였고 따뜻한 차와 크랜베리 머핀을 먹으며 그동안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내가 일 년 전쯤에 두세 번 정도 잠깐  내 수업에 참여했던 그의 중국인 부인 에밀리(Emily)가 잘 지내고 있는지, 왜 요가에 안 오는지를 묻자 뜻밖에도 아내가 집을 나간 지 6개월이 지났다는 얘기를 전해줬다. 그리고 얼마 전에 연락이 되어 이혼 수속을 밟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요가원에서 보았던 두 사람의 다정함이 지금도 눈에 선하여 Are you serious? (농담이지?)하며 믿지 않자 얼굴이 어두워지며 자신도 믿기지가 않지만 사실이라고 말을 하였다. 요즘 잠자는 것도 힘들고 도저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며 절망적인 표정으로 말하는 중에 커피 잔을 잡고 있는 손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늘 수업 전에 온갖 화젯거리를 가져와서 신나게 얘기하던 그의 밝은 모습을 지난 몇 개월 동안 못 봤던 거 같다. 혼자 엄청난 스트레스와 감정의 혼란을 경험하고 있었는데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그는 갑자기 사라진 그녀에 대한 배신감과 이혼, 앞날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가끔 가슴에 통증이 느껴진다고 했다.


그날 두 사람의 안타까운 이혼 얘기를 듣고 주제가 자연스럽게 Pain과 Suffering으로 옮겨 갔다. 누구나 삶에서 아픔과 고통(pain, Suffering)을 경험하지만 그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쉽게 얘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실패자로(Failure)로 보일까 봐 혹은 내 고통이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될까 봐 혹은 그것이 나의 약점으로 보일까 봐 그리고 그들의 반응(Reaction)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이, 그들의 판단이(Judgement)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John은 이제 얘기를 꺼내 놓기 시작했고 숨이 콱 막힐 것 같은 부정적 에너지를 흘려보내며 스스로 치유를 향한 긴 여정을 천천히 시작하고 있었다.


Pain이라 함은 우리가 성장하기 위해서 겪어내야 하는 과정으로써 피할 수 없는 삶의 한 부분으로 Suffering과는 구별된다. 예를 들어 내가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하자. 이것은 Pain이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Unavoidable part ). 그러나 밤새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며 '이렇게 잠을 자지 못한다면 내일은 정말 끔찍한 하루가 될 거야' 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지새운다면 이것은 Suffering이다. 이것은 우리가 피할 수 있는 상황이다(Avoidable part). 쉽게 말해서 우리가 문지방에 발가락이 끼어서 아프다면 Pain이라고 말하지 Suffering 하다고 말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John의 아내가 집을 나갔고 마침내 이혼을 함으로써 두 사람의 관계가 끝났다는 것은 사실이고 엄청난 아픔이다. (Pain) 그러나 그 상황에서 고통을 어떻게 매니지(How to deal with Suffering)하는가는 John의 선택이다.


간단히 말해서 Pain을 받아들이면(Acceptance) Suffering이 없고 Pain을 저항하면(Resistance) Suffering이 생기는 것이다. Pain은 실제 존재하며 (Pain is real)  우리는 치유가(Healing) 일어날 수 있도록 고통을 느끼고 경험하는 시간들이 필요하다.


나의 예를 하나 들어 보겠다.

내가 처음 요가를 가르칠 때 수업이 끝나면 학생들이 Thank you Lida! It was nice stretch!라고 칭찬하면서 See you next class! 하고 가면 그 말을 믿고 다음 시간에 그 학생이 오기를 기대하고 기다렸다. 그러나 끝내 그렇게 말한 학생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들의 칭찬이 립서비스(Lip Service) 였음을 알고 매우 실망이 되어 풀이 죽곤 했었다. (미국 사람들이 상처를 줄까 봐 싫은 소리를 못하고 앞에서 칭찬을 한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수업에 그들이 오고 안 오고는 내가 조절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 스스로 만든 기대감으로 인해 얻어지는 Suffering인 것이다. 때로 우리는 내 능력 밖의 일을 가지고 고통 속에서 헤멜 때가 있곤 한다. 그럴 때 우리가 내 능력 밖의 상황임을 이해하고 마음을 내려놓는다면 더 이상 Suffering이 없는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아픔(Pain)으로 인한 고통(Suffering)을 겪을 때 대체로 두 가지 반응을 보이는데 한 가지는 고통을 피하려고 하는 행위(Pushing Suffering away)들이고 다른 한 가지는 고통을 끌어안는 것(Holding onto Suffering)이다. 고통을 피하려고 하는 행위들로는 손쉽게 진통제나 수면제 등(Pain Killer)을 복용한다든가, 쇼핑(Shopping), 오락(Entertainment),  쾌락(Sensual Pleasure) 혹은 중독성 물질(Intoxicants)에 의존하는 것을 말하고, 고통을 끌어안는다 함은 고통을 내 보임으로써 타인으로부터 관심을 끌고 동정심을 얻고자 하는 행위를 말한다. 밀고 당기고(Push or Pull) 부정과 관용(Deny or Indulge), 아무 일도 없는 듯이 태 척하거나 심하게 통증을 과장하거나 하는 이런 아주 극단적인 선택들이 어쩐지 나의 행동들과 친밀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삶에서 일어나는 Suffering은 불편함(discomfort),  통증(pain), 비통함(anguish), 불만족(dissatisfaction), 실패(failure), 갈등(conflict), 상처( hurt) 등의 감정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살면서 어느 누구도 결코 피해갈 수 없는 감정들이다. 그럼, 만약 앞에 열거한 부정적 감정 중 하나가 당신의 문을 똑똑 두드린다면 어떻게 하겠는가?(What do you do when one of these comes knocking at your door?)

밀쳐 내 버리겠는가? 덮어 버리겠는가? 무시하고 주의를 다른 데로 옮기겠는가?


우리 사회에서 고통을 부정하는 것은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광고를 한 번 보라! 오로지 젊고 아름다움(Young and Beauty)에만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지 않은가? 늙은 사람들이 아름답게 묘사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들은 실버타운이나 별도의 시설로 보내져 있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은 나이 들어가는 과정을 보지 못함으로써 자신이 나이 들어가는 과정을 고통으로 여긴다. 사람들은 조금만 추워도 더워도 싫어서 철새처럼 더우면 시원한 곳으로, 추우면 따뜻한 곳으로 이동해 다닌다. 실제로 내가 현재 일하고 있는 백만장자들이 사는 동네의 요가원은 시애틀에 비가 오기 시작되는 10월이 되면 반 이상이 따뜻한 캘리포니아주나 애리조나주로 이동해 가기 때문에 요가원에 학생수가 반 이상이 줄어든다. 또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거주 공간이 아주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의 삶이 결코 공유되지 않아서 부자가 조금만 가난해져도 엄청난 고통으로 받아들인다..

 
 결론적으로 고통을 거부하는 것은 (The Denial of Suffering) 실제 감정을 꾹꾹 누르고 억누르는 것이라서 그 감정이 꽉 차게 되면(Pile up) 마침내는 다른 감정들도 느끼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렇게 되면 삶은 진실된 감정이 드러나지 않게 되어 껍데기만 남고 항상 허전함을 느끼게 된다. 다시 말해 고통을 거부하고 고통이 없는 양 숨기는 행위들은 생명력이 없는 삶이라 하겠다.

그럼, 반대로 대화를 통해서나 제스처 혹은 이미지로 상대방에게 내 고통을 보여주는 행위는 어떠한가? 내가 얼마나 힘든가를 알아달라는 일종의 관심을 끌기 위한 동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런 행위는 고통을 적게 하지도 크게 하지도 않는 효과가 없는 방법 중의 하나일 뿐인데, 부작용이 있다면 고통을 끌어안음으로써 내 통(My Pain), 내 문제(My Problem), 아플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No choice)는 강한 관념을 갖게 되어 고통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통을 겪을 때는 밀어내지도 말고 그렇다고 끌어안지도 말고 단지 내 고통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부처가 말했듯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 단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한다는 사실이다." 를 이해하는 것이다. 각자의 삶은 시계추처럼 자신의 궤도를 돌면서 변화하고(Changing), 움직이고(Moving), 흘러간다(Flowing). 그 어떤 것도 계속 머무는 것이 없으며 아픔(pain)과 기쁨(Pleaasure)은 번갈아가며 일어나고 그것 또한 실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일어나는 일에 대한 반응으로 느껴지는 감정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 삶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고 그 감정들을 느끼는 것은 매우 중요한 힐링(Healing)의 한 과정이다. 고통은 결코 영원하지 않으며 삶의 거대한 흐름 속의 한 부분이라고 이해하면 조금은 쉽게 고통을 이겨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따라서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대단한 기술을 찾아 쫓아다닌다든가, 몇 시간이고 앉아서 고통을 없애는 수련을 한다든가, 아름다운 꽃과 나무가 있는 자연을 찾아 호흡 수련을 한다든가 할 필요는 없다.  단지 당신이 기독교인 라면 시편 55장 22절에서" Cast your burden on the Lord, and He shall sustain you; He shall never permit the righteous to be moved."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또 베드로전서 5장 7절  "Casting all your care upon Him, for He cares for you" " 너의 염려를 모두 주게 맡겨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하셨으니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복종(Surrender to God)함으로써 내 무겁고 힘든 짐을 넘기고 릴리스(release)하길 바란다.  


한편 요가에서는 Suffering을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 Yoga Sutra2장 15-16절에서 얘기하고 있다.  

2장 15절에서는  

Change, longing, habits, and the activity of the gunas can all cause us suffering. In fact, even the wise suffer, for suffering is everywhere.

우리가 생활에서 겪는 삶의 변화, 갈망, 습관 등이 삶의 고통을  유발하고 고통은 어디에나 있다.

2장 16절에서는

 Prevent the suffering that is yet to come.

그러나 미래의 고통은 피할 수 있다.


 고통을 유발하는 첫째 요소인 삶의 변화(Change)라 함은 쉽게 날씨의 변화에서부터 아이를 임신한다든가, 이사를 해서 낯선 곳에 정착을 한다든가, 새 직장을 구했거나 잃었거나 등의 모든 변화를 말한다.  둘째, 갈망이라 함은 자기가 갖지 못한 것을 원하는 것 즉, 더 좋은 집, 자동차, 직장, 사랑하는 사람, 승진 등을 추구하는 감정이다. 셋째, 습관이라 함은 자기가 알면서 혹은 모르면서 행하고 있는 자신의 질을 떨어드리는 습관들을 말한다. 언어 습관이라든가 부정적인 사고 패턴, 지각하는 행위, 약속을 어기는 행동, 거짓말을 하는 하는 행동 등을 일컫는다.  또한 어느 누구도 이 감정들을 피해갈 수 있는 면역력이 없으므로 고통은 어디에나 있다고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2장 16절에서는 우리가 고통의 원인을 알고 좀 더 의식한다면 미래의 고통은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가는 우리에게 가르친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Equanimity)을 잃지 않는다면 고통의 정도는 아주 작아질 것이라고... 지나간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오지 않은 미래에 불안해하지 말고 그저 현재 이 순간에 존재하라고.. 이러한 평정심은 오랜 시간 동안 명상 수행을 통해서만이 얻어지는 깨달음의 결과이다.


내 마음이 요동치고 불안함과 고통속에 있을 때 나는 내면 아이를 만나는 명상시간을 갖는다.

(1) 편안하게 앉아서 허리를 펴고 눈을 감는다.

(2) 호흡에 의식을 가져오며 숨이 들어가고 나가는 것에 집중한다.

(3)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 해질 때까지 호흡에 집중한다.

(4) 마음속에 푸른 초원과 따사한 그리고 잔잔한 바람이  나무 밑 그늘에 편안히 앉아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본다. 저 초원 끝에 파란 하늘이 닿아 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뭔가 조그만 것이 보인다. 가만히 걸어가 보니 아주 작은 아이가 나를 보고 환히 웃으며 반긴다. 자기에게 가까이 오라고 한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 아이는 날 꼭 닮았다. 아주 귀엽고 예쁜 단발머리를 한 다섯 살 아이다. 그 아이가 말한다. 고통이 너무 심해서 아주 많이 힘들고 외롭고 두렵다고.. 나는 아이를 꼭 껴안아주며 말한다. 걱정하지 마, 내가 항상 옆에 있어줄게. 떠나지 않을게. 다시는 혼자 두지 않을 게. 네 고통을 함께 나눠줄게. 다시는 네 잘못이라고 너를 책망하지 않을게. 너를 사랑해. 너는 지금 이대로 너무 충분해.. 아이는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초원을 걷고 있는데 많은 연(Kite)들이 하늘 위에서 날아다니는 게 보인다. 아이가 연 하나를 잡아서 나에게 준다. 나는 연줄을 꽉 쥐고 걷다가 천천히 손가락을 풀며 살포시 놓아 버린다. 바람이 연을 높이 높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데려간다. 나는 내게 있던 모든 짐이(Burden) 연과 함께 사라짐을 느끼고 편안하게 호흡을 한다.     

 

이제 이해가 되는가? 꽉 붙잡고 있는 줄을 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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