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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기억의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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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혜 Nov 15. 2021

불을 주세요

나는 다시 쓰고 싶다.


1

오랜만에 기도를 했다. 내가 사는 동네 뒷산에는 혼자서 기도하거나 책을 읽기 좋은 작은 공터가 있다. 지금 그 곳에는 바싹 타버려서 떨어진 나뭇잎들이 가득하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 걸까? 나는 다시 쓰고 싶다. 그것들을 이제 그만 태어나게 하고 싶어. 무엇보다도 잃어버린 불을 되찾고 싶다.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못 가져도 바보같이 행복한 마음이 필요하다. 그런 건 불이 아니면 안된다. 나는 언제나 창조적인 불을 잘 다루는 연화술사가 되고 싶었다. 내 안의 불을 일깨워 한 송이 사자를 피워내고 싶었다. 그 사자는 먹을 것이 필요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것이며, 나를 나답게 보호해주는 존재일 것이다. 한때 나의 전부였던 시가 내게 약속한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시詩라는 건 정말로 존재한다. 종이 표면에서만 살아숨쉬는 게 아니라 마치 사람처럼 돌아다니고, 사고를 치고, 울기도 하고, 저주하면서 떠나버리기도 한다.


2

등단하자마자 떠나버린 시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던가. 시가 내 안에 풀어놓은 독이 빠져나가기까지 무려 이 년이 걸렸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선생님을 애써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어느 누구에게도 '지금 내 상태가 이러해요' 라고 티를 내지도 않았다. 다만 지인들이 '왜 시를 쓰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마음이 식었어'라고 에둘러 말했다. 나는 시가 좋다못해 무서웠다. 시는 나에게 전부를 요구했고, 나는 시 쓰는 나와 일상의 나를 분리할수 있을 만큼 요령이 좋지 못했다. 시를 쓸수록 편협하고 예민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세상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이 싫었다. 시가 요구하는 낮은 자세- 이를 테면 슬퍼하는 능력, 소유하려고 하지 않는 마음 등-를 기꺼이 유지하면서 살아가기에는, 나는 현실적이고 건방진 사람이었다. 내게는 시 쓰는 것 말고도 해야할 일이 너무 많았다. 또 다른 욕심도 많았다. 시는 내 인간관계도 완전히 바꿔놓았으나... 나는 그들로부터 도망쳤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늘 어딘가 삐딱하거나, 어딘가 아픈 사람들과 자주 부딪혔다.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면 도무지 대화도 관계도 깊어지지 않았다.


3

나를 오랫동안 지켜본 친한 언니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인복이 없다는 말은 하지마. 돈, 권력 있는 사람? 건강하고 영리한 사람? 부질없어. 네가 어떤 말을 할 때 그 말을 귀기울여 듣는 누군가 있다면 그 사람이 귀인이야." 그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하지만 그들이기 때문에... 만족이 안된다. 이제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다. 나는 다시 쓰고 싶다. 그것들을 이제 그만 태어나게 하고 싶어. 단 한 사람이라도 읽고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면 된다. 바로 당신이라고 생각하며 똑바로 걸어가는 마음으로 써내려갈 것이다.


'그러나 어려운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거대한 혹처럼 태양을 등지고 네가 내 앞에서 걸어오고 있다. 내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바로 너라고 생각하며 나는 똑바로 걸어가고 있다.' (김행숙, '그러나')



2021. 11.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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