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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기억의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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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혜 Feb 02. 2022

꿈 일기 1

불을 지르고 오지 못한게 후회가 된다.


꿈에서 깨어났다. 아주 긴 여행을 한 것 같다. 그 빌어먹을 집에 불을 지르고 오지 못한 게 후회가 된다. 평소 지나칠만큼 조용하다가도 한번씩 뒤집어지는 어느 가정집이었다. 젊은 엄마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아서 아이를 때리고 있었다. 아이는 엄마가 사라지고 없는 집에 혼자 남아 부엌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날리는 밀가루, 바짝 마른 강아지의 혀, 도자기 화분 속에 박혀 있는 숟가락과 젓가락. 아빠는 없다. 아빠는 오래 묵은 가죽 소파가 되어 길게 누워있었다. 나는 젊은 엄마였다가 아이가 흘리는 눈물이었다가 마지막에는 그들의 집에 방문한 낯선 손님이 되었다. 손님이란 그저 지켜보는 사람이며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해야 하는 사람이다. 아이는 엄마와 꼭 같은 얼굴로 자라나 다시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었다. 아이는 이상하리만치 작고 마른 데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천장과 벽을 수놓은 검은 그을음,  반짝이는 칼과 식기, 수조 속 살아남은 단 한 마리의 물고기. 아이 아빠는 어디에 있을까? 아빠는 이번에도 없다. 아빠가 어딘가 숨어있다고 확신한 나는 집안을 샅샅이 뒤졌는데… 어떤 방에 들어갔다가 벽에 걸린 전신 거울을 보았다. 나는 거울 앞에 섰다. 어떤 감정도 담지 않은 메마른 눈을 가진 초로의 남자가 서 있었다. 거울 속에서 아이의 아빠가 걸어 나와 엄마와 아이가 있는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에서 다시 무언가 쿵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아이가 찢어지게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야흐로 꿈이 조각 조각 찢어지고 있었다. 깨어나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는데, 내 수중에는 아쉽게도 불이 없었다. 그 빌어먹을 집에 불을 지르고 오지 못한 게 아직도 후회가 된다. 그 집. 그 집.



2022.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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