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하기 싫은 ‘진짜’들

‘가짜’들이 대체 해줄 수 있을까?

by 민또


살을 빼보려는 시도를 해보았던 사람들은 흔히 알법한 ‘거짓 배고픔’이라는 개념이 있다. 허기짐을 달래기 위해서 삶아낸 브로콜리 일지라도 내입에 우겨 넣을 요량이라면 그제야 그 배고픔을 진짜라 할법하다는 것이다. 초록송이는 굳이 먹지 않겠다면 그것은 거짓 배고픔이라는 것.


허나 내가 배고픔을 느끼는 것이 비단 위장에서 그 밖의 생존을 담당하는 내 몸뚱이의 기관들에서 위협을 표하는 것뿐만은 아닐 것이다. 나의 맨탈을 주관하는 두뇌의 일부 기관에서, 그리고 유희와 쾌락을 도맡은 어느 특정 집단에서, 또는 과거의 찬란한 기억에 젖어 그때를 추억하는 어떤 세포들에 의해서 어쩌다 유발된 배고픔이라 한들 그것을 거짓이라 그 누가 쉽게 딱 자를 수 있는 것인가? 내가 배고프다는데?


어느 대화든 대화 중에 부쩍 ‘팩트’라는 단어가 자주 들리게 되었다. 그 단어에 피로감을, 권태감을 느끼게 된지도 좀 되었다. 우리는 자의적으로 어쩌면 타의적으로 구성된 자기 딴의 ‘사실’이라고 굳게 여기는 것들에 강하게 의존하고는 한다. ‘팩트’라는 단어로서 ‘사실’이라는 단어보다 발음의 파열이 쌘 그 수사가 요즘 들어 그 맹신을 이전보다 공고히 해내고 있고, 그 맹신의 ‘선’을 절대 넘지 말라는 경고성 주장으로서 ‘팩!트!’라는 단어를 듣게 되고는 한다.




얼굴을 마주하는 면대면을 넘어 SNS를 통해서, 스마트폰의 메신저들을 통해서 우리의 각자마다의 팩트의 밀도들을 높여나가는 오늘날. 그 저마다의 팩트의 신호를 주고받는 주파수며 신호의 강도는 어떤 계층에 속해있느냐에 따라 영향력이 다르게 전해지게 된다. 영화 [기생충]안에서 나타난 이를 테면 3가지 계급은 저마다의 대표적인 미디어 도구를 가지고 있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1)지하계층의 모스부호(가장 원시적이며 편리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2)반지하계층의 공짜와이파이, (3)언덕위계층의 놀이로써의 워키토키(가장 직관적이며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닌)가 그것. 손에 들리어 장치화된 그것들에 기생하고 의존하며 각각의 우발적이고 때로는 계획적인 저마다의 신념화된 진짜 – 팩트들을 나누는 과정에서 공동계층을 넘어선, 계층간의 커뮤니케이션은 불가능이라고 단정짓는 편이 복잡함을 덜기 좋다.


다른 계층 안에서 살펴보기에 다른 계층이 설파하는 팩트들은 기존에 자신들이 진짜라고 굳게 믿고 있는 신념과 빗겨나가 있는 수 가 많을 수 있고 그것을 다른 계층의 일원이 진짜라고 구태여 받아들이는 데에는 자기 계층의 데미지를 감당할 수 있을 때야 그 손상을 회복할 수 있다.


진실을, 진짜를 직면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궁극적인 가치가 나의 신념은 송그리 파괴시킬 위협으로서 무게한다면 그 진짜는 긍정적인 개몽이라기 보다 나의 우주를 파괴하고 나의 체계를 붕괴시키는 핵무기가 되는 것이라 그 진실의 까발림을 애써 무의식으로부터 원천적으로 모른 채하고 기존의 팩트속으로 자신을 숨겨버리며 숨어든다. 그 데미지에 대한 탄력성은 가지고 있는 신념이 견고할수록 빡빡해질 뿐만 아니라 그 신념이 엉터리 일 경우에도 일방항적일 수 밖에 없다.


극중 워키토키를 가지고 놀던 부잣집 아들은 하위계층의 모스부호를 해석하다 만다. 전달 될 수 있는 그 부호에 담긴 사실적인 메시지가 부잣집 아들에게는 선택적으로 무시할 수 있는 영역이었기에. 그렇게 하는 편이 더 쉽기에. 외면한다.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송강호의 아들이 송강호에게 적어 내려간 편지의 내용(언젠가 돈을 많이 벌어 그 집을 사러 오겠다는)은 세상 그 어떤 각오보다 허망하다. 관객으로서 우리는 그 바람이 결국 꺾여버릴 수 밖에 없는 허황된 꿈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그러면서 우리 스스로도 그런 바람을 가슴속에 품고 살고 있으나 그 허황됨에 대하여 외면하며 살고 있음을 인지하기에 씁쓸하게 영화관을 떠나 나온다. 스스로를 위로할 최후의 방어책으로서의 위선과 가식을 넘어 순수한 진실의 존엄을 지켜나가는데 기력을 쏟으려면 우리는 그만큼 여유로울 수 있어야겠다. 넉넉해야겠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사실 배가 너무 고프다. 거짓 배고픔을 급히 채워낸 - 거짓 배부름은 그 순간 달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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