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을 맞아 다른 지역에서 PT를 받는 딸이 물었다. "엄마는 어떤 운동이 제일 재밌어?" 재밌는 운동? 무슨 말이지? 생각이 안 났다기보다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재미? 성취감과 뿌듯함이 들긴 하지만 "재미"라니. 내게는 더 힘든 운동과 덜 힘든 운동, 더 하기 싫은 운동과 덜 하기 싫은 운동이 있을 뿐인데. 배드민턴이나 탁구라면 모를까, 허벅지가 터질 것 같고 팔뚝이 찢어질 것 같은데 무슨 재미? 할 말이 없어 대답 대신 같은 질문을 던졌더니 딸아이는 한참을 이야기한다. 데드 리프트가 가장 재밌고, 자세가 좋다고 칭찬을 받았단다. 영상통화로 스쿼트와 몇 가지 스트레칭 자세를 보여 준다. 스쿼트 할 때 무릎이 바깥으로 향하지? 라며 그게 중요하다고 콕 짚어 얘기한다. 나는 딸아이 나이에 운동할 생각은 꿈에도 안 했는데, 나를 안 닮아 다행이다.
잠깐 다른 얘길 해 볼까? 실내디자인학과 1학년 전공 실기 시간, 아직 본격적인 설계 수업에 진입하기 전에 하는 기초조형 수업. 소위 외워서 그린다는 입시 미술을 거쳐 들어온 학생들이지만 아이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금세 적응한다. 내가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실험하고 도전한다. 프로젝트의 목표는 같지만, 결과물은 수강생 숫자만큼 다르다. 교과목을 분반해서 수업하면 더 다양해진다. 옆에서 조언하며 발전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정말 재밌다.
미대 입시 제도에 늘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내가 입시생이던 80년대 중반부터 교수가 되어 학생을 선발해 온 지난 30여 년간 기회만 되면 비판의 날을 세웠다. 대한민국 디자인의 초라한 경쟁력은 모두 잘못된 입시 제도에 있다고 생각했다. 교수가 되어 체육관 바닥에 깔린 몇 천 장의 그림을 내려다볼 때마다 그 생각을 확인했다. 제한된 시간에 외워서 그리는 입시 미술은 창의력을 키워주지 않는다.
1학년 수업 시간에 학생들을 보며, 입시 미술이 아이들의 창의력을 뿌리째 없애버리는 건 아닌 것 같아 안도한다. 오히려 4~5시간 엉덩이 붙이고 앉아 반드시 한 장의 그림을 완성해 내야 하는 훈련 덕분에 그 정도의 집중력을 체득하게 됐다. 지금 MZ세대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집중력을 보인다고 한다. 손에 쥐고 있는 스마트폰 화면은 몇 초 단위로 움직이며 아이들의 주위를 분산시킨다. 그런 아이들이 네댓 시간씩 한자리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또 반드시 완성한다. 그 ‘엉덩이의 힘’이 근육이 되어 성장의 발판을 만들었다.
나는 수업 시간에 학생들의 기발한 아이디어를 보며, "너무 재밌다." 혹은 "너무 재미있지 않니?"라는 말을 반복한다. 학생들은 수줍게 웃기도 하고 “재밌어요.”라고 답하기도 한다. 갑자기 궁금해진다. 학생들도 속으로 "웬 재미?" 했을까?
각자 재밌는 영역이 다르다는 것,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정체성에 따라, 문과 공부가 재밌을 수 있고 이과 공부가 재밌을 수 있고, 수학이 재밌을 수 있고 영어가 재밌을 수 있고, 같은 전공을 선택한 아이들 사이에서도 재밌는 영역이 다르다는 것, 모두가 모든 분야를 다 재밌어 할 수 없고, 재미가 좀 없더라도 해야 하는 일도 있고, 재미없지만 계속하다 보니 재밌어지는 일도 있고, 나는 재미없는데 누군가는 재밌는 영역이 있어서, 아무리 잘나도 혼자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고, 내가 재미없는 일에는 그게 재밌는 누군가의 도움과 협조를 받아야 하므로, 연대의 힘과 겸손을 배울 수 있는 세상, 그래서 세상이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