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보이는 풍경이 다릅니다. 높은 곳에 서면 멀리 볼 수 있지만, 세세한 것은 파악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낮은 곳에 서면 멀리 볼 수는 없지만, 눈앞의 것을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누구나 저마다 보는 자리가 다릅니다. 사람마다 입장이나 인식 수준이나 신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각자 보는 것도 다릅니다. 후설, 토마스 쿤, 장자는 이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한 사람들입니다.
후설은 사람마다 대상에 대한 인식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으며, 그것을 인정해야 현상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쿤이 말한 패러다임의 차이는 결국 인식론의 차이입니다. 패러다임이 다른 사람들끼리는 서로 통약할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른 것을 보고 각자 자신의 의견만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장자>에 나오는 매미와 새끼 비둘기는 구만리를 날아가는 붕(鵬)이 전혀 이해가 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붕새가 보는 것을 볼 수도 없습니다. 애초에 차원이나 격이 다른 것입니다. 보이는 만큼만 사유할 수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하나의 교육 현상도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즉, 어떤 보는 자리를 갖는가에 따라 보는 방식도 달라집니다. 이것을 교육관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교육 현상에 대한 해석의 틀이 바로 교육관입니다. 교육관은 단순히 교육 현상(사실)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의 숨겨진 뜻을 파악하는 해석이 핵심입니다. 그러나 모종의 교육 현상에서 하나의 뜻을 붙잡는 해석은 먼저 어떤 자리가 결정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요컨대 교육 현상에 대한 어떤 생각이나 이론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보는 자리, 즉 교육관이 결정되어야 합니다.
저의 교육관은, 간단히 말해, 경험론과 합리론의 종합적 관점입니다. 이때, '종합'은 교육의 결과로 주체가 획득하는 개념 속에 선험적 이념(합리론)과 경험 내용(경험론)이 원인과 계기로 결합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경험론과 합리론이 종합된 교육이란 나 안에 들어 있는 선험적 이념을 나의 외부에서 오는 감각적 지각과 경험이 작용하여 교육의 결과인 개념을 만들어 내는 행위입니다. 합리론과 경험론은 교육의 결과인 개념 속에 동전의 양면과 같이 서로 불가분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