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재능 이야기가 나올 거라서, 우선 그에 대한 견해에 대해 잠깐 쓰려고 하는데, 내용이 너무 주관적이니 참고만 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말 것.
직관적으로 이해하듯이, 적은 노력으로도 훌륭한 퍼포먼스를 낼 때 우리는 "쟤는 타고난 재능이 있어서 그런가 봐"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개인적인 생각은, 물론 재능의 차이가 결과에 어느 정도는 영향을 미치겠지만, 과연 그렇게까지 크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논란의 소지가 있으니 여기서는 진리의 케바케, 경우에 따라 다르다는 말도 좀 추가해주고. 뭣보다, 재능이란 실체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적은 노력으로도 훌륭한 퍼포먼스를 낼 수 있게 되는 것이, 정말 재능에 의한 영향보다는, 재능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다른 무언가에 의한 영향이 더 크지 않을지 의심해볼 필요는 있다.
난 그중 하나가 exclusive한(독점적인) 선행학습과 같은 개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물론 사회적으로 이것이 유도되면 exclusive의 의미가 없어져서 치킨게임? 같은 게 된다..). 누군가 혼자 미리 배워뒀다면, 혹은 미리 경험했다면, 당연히 적은 노력으로도 훌륭한 퍼포먼스를 내겠지. 엄밀하게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적은 노력이지만,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미 많은 노력을 해왔다는 것이다. 사실 이 개념은 피터 틸이 Zero to one에서 다루는 독점이라는 걸 내가 자의적으로 확장해서 이해한 것일지도.
영어권 살다온 친구들이 한국에 왔다고 하자. 영어를 잘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영어에 재능이 있었던 것일까? 물론 재능이라는 게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그것보다는, 그들이 우리와는 달리(exclusive) 영어권에서 살면서 영어를 이미 충분히 경험하고 익힌 것이 더 크게 작용할 것이다.
또 학부 1학년 때 C언어 같은 기초 프로그래밍 과목에서 훌륭한 퍼포먼스를 내며 날아다니는 애들은 대체로 컴공과 애들인데, 그러한 컴공과 애들의 재능이 그들의 퍼포먼스에 영향을 미친 것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그들 중 상당수가 C언어를 이미 고등학교 때 다뤄봤다는 것이 더 크게 작용할 것이라는 것. 비컴공과 진학한 애들 중, 특히 일반고 출신으로 국영수 위주로 공부했어요라는 애들 중 중고등학교 때 C언어 만져본 애들이 얼마나 있겠는지를 생각해보자(근데 어이없게도 그게 나다). 또 반대로 실제로 코딩을 해본 적은 없지만 뭔가 환상을 따라 컴공과에 온 애들이 몇 명이 될는지, 또 한편으로는 그들은 C언어 과목을 들은 후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해보자.
2) 이제 여기서부터는 재수없는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아무튼간에 적은 노력으로도 훌륭한 퍼포먼스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 재능에 의한 것이든, exclusive한 선행학습에 의한 것이든, 나에게 있어 일본어는 그런 분야였음을 인정해야 될 것 같다. 정말로, 조금만 공부하면 금방 실력이 늘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4년 동안 일본에서 살았었다. 물론 워낙 어렸을 때였기 때문에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중학교 때 학교에 일본어 과목이 있어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공부했는데 금방 일본어 능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내가 회복할 수 있는 일본어 실력은 일본 생활하던 6살까지, 즉 꼬마 아이가 구사할 수 있는 일본어 능력까지 였는데, 그래서인지 일단 어휘, 회화, 문법 등 일반적인 언어능력은 금방 실력을 높일 수 있었다. 문법에 의아할지 모르겠는데, 이게 왜 그런가 하면 머리로 사고하며 문법 틀을 고려하는 게 아니라, 일단 정확한 문장 자체가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 문장들을 통해서 직감적으로 문법을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 정말 무시무시하다.. 예를 들어 1단 불규칙 동사 같은 게 어떻게 변화되는지 복잡하게 외울 필요 없이 머릿속에서 이미 정리되어 있었다=_= 이래서 언어는 어렸을 때 배워야 되나 봐.. 하지만 6살 꼬마도 한자 같은 건 모르니까, 이건 그냥 내 힘으로 열심히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뭐 암튼 그런 식으로 공부하다 중2 때는 구 JLPT 3급도 땄었다. 중학교 때부터 JLPT 공부하는 사람 자체도 드물다는 점, 그리고 남들이 가지지 못한 독점적인 일본어 경험이 있었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 말콤 글래드웰 같은 사람이 말하는 소위 1만 시간의 법칙에서 몇천 시간을 중학교 때 이미 확보한 셈이다. 아 물론 일본어는 특이하게 워낙 굇수가 많으니 중학생 나이에도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널렸겠지만.. 어찌됫건 만약 계속 일본어 공부했으면 지금쯤 1만 시간 다 채웠을지도 모르는데 말 입니다만,
난 뜬금없이 공대생으로 2차 전직했다.. 무슨 일이 있었냐면..
중3 때는 부모님의 조언으로, 외고 일본어과를 가려고 준비했던 적이 있었다. 사실 일반적으로는 그게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럼에도 난 일본어를 공부해서 앞으로 뭘 해야겠다는 목적의식이랄까 소위 말하는 꿈같은 게 없었다. 앞으로 일본어로 먹고살 수 있을까 자신도 없었고.. 그렇게 진로를 고민하다,
"고심 끝에 지원도 안 하고 포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제목에는 일본어로 1차 전직이라고 했는데, 엄밀하게는 1차 전직도 포기한 셈이다. 왠지 모르겠는데 감정적인 판단인 것 같고, 아니면 그냥 똥고집이었는 듯. 그 이후로 일본어는 내 갈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발걸음을 멈췄다. 그 정도면 어느 정도 재능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단지 감정적으로 하기 싫어서 재능을 버렸다니, 지금 보면 좀 어이없기도=_=
그리고 고등학교 와서는 뜬금없지만 일본어와는 전혀 관계없는, 수학/물리를 열심히 공부했다. 사실 뜬금없다고 하긴 좀 애매할지도 모르겠는데, 수학 같은 건 중학교 때부터도 쭉 열심히 해서 훌륭한 성적은 아니더라도 적당히 좋은 성적은 받고 있었으니.. 또 내가 열심히 하던 취미인 큐브가 무의식적으로 나를 이공계로 이끌어줬을지도 모르고. 큐브가 딱히 직접적으로 공부에 도움되는 건 아닌데, 데이터적으로 봤을 때는 큐브계에서 활동하는 대학생들 보면 왠지 모르게 대체로 잘 나가는 이공계생들이 꽤 많더라구.. 생각해보니 큐브라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 exclusive한 선행 경험이라고 볼 수 있어서 그럴지도. 암튼 고등학생 때 열공하고 어찌어찌하다 공대생으로 2차 전직하게 되었고, 나 역시 결국 큐브계에서 활동하는 이공계생 인구의 한 명이 되었다..
3) 넓은 의미에서 연구라는 분야가 나한테 맞다고는 생각하는데(이것조차 큐브때문에 그렇게 느꼈다=_=) 구체적으로 뭘할지, 분야를 정하지 못해서 문제. 전자공학도로서 내가 exclusive한 것이 있다면 좋고, 아니면 전에 배운 일본어를 수단으로써 활용하면 좋고. 그리고 그런걸 아직 찾지 못했다. 그나마 일본어가 전공이랑 관련 있는 걸 억지로 생각해내자면 자연어 처리? 이 정도밖에 없는 듯.. 대학원이라는 3차 전직을 앞두고 있는데.. 뭘 할지 모르겠다. 와칸나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