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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도쿠 Aug 11. 2019

사람이 사람을 믿어야지

우리 집 근처에는 세 개의 고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러다 보니 학생들의 필수 간식이라고 할 수 있는 분식집도 군데군데 있는 편이다. 장사가 어련히 잘 되지 않을까 싶지만 생각보다 오래 못 가서 간판이 바뀌고 만다. 요즘 아이들이 건강을 생각해서 야자가 끝난 늦은 저녁에 야식을 기피하는 것인지, 야자가 끝나고서도 학원에 가야 하기 때문에 분식집을 그냥 지나치는 것인지는 모른다. 아무튼 내가 고등학생 때와는 다르게 분식집을 찾는 횟수가 확연히 적다는 것이다.


그 분식집 중에서는 3년 넘게 장사를 했던 닭강정 집이 있다. 평소 닭고기를 매우 좋아하는 나로서는 5,000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주 찾던 곳이었다. 대부분이 1년을 못 가 그만두고 마는데 3년을 넘게 했으니 그 부근에서 학생들에게 꽤나 인기가 있던 집이었다. 이제는 아주머니의 얼굴도 생각이 나지 않지만 그 앞을 지날 때면 항상 인사를 드리곤 했었다. 푸근한 인상을 지녔고 서글한 미소가 인상적인 아주머니였다. 이제는 사라지고 없지만 가끔 그 앞을 지나칠 때면 예전 닭강정을 사 먹던 때를 가끔 떠올리곤 한다.


흔하디 흔한 닭강정 집이었지만 그 닭강정 집을 좋아했던 이유는 꽤나 인상 깊었던 추억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대학생 시절 주머니가 넉넉하지 않아서 항상 잔금을 체크하면서 소비를 해야만 했다. 다행히 그런 습관 덕분에 잔고가 모자랐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한 번 잔고가 없어서 당황스러웠던 적이 있었다.


그 닭강정 집은 우리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떡하니 위치해 있었다. 유난히 배고프던 어느 날 닭강정의 향긋한 냄새가 내 코를 스쳤고 무언가에 이끌리듯 저절로 발걸음이 향했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첫 방문했던 날이었다. 5,000원짜리 닭강정 한 박스를 주문했고 집으로 가져가려던 찰나였다. 무심코 생각 없이 체크카드로 결제하려는데 통장에 잔고가 없던 것이었다. 급히 지갑을 꺼내 현금을 뒤져봤지만 알량한 100원짜리들만 찰랑찰랑한 소리를 낼 뿐이었다. 이미 포장까지 마친 터라 그 앞에서 난색이 가득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5,000원이 큰돈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나중에 지불할게요'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익히 얼굴을 알고 있었다면 상관없겠지만 처음 방문했고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상식적으로 이 상황에서 외상한다는 말이 입밖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아주머니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학생, 일단 가져갔다가 나중에 계산해도 돼."


아주머니의 그 말씀은 대단히 감사했지만 순간 의문이 들었다. 무엇을 믿고 이렇게 줄 수 있는 것일까. 내가 나쁜 마음을 먹은 사람이었다면 그냥 갖고 튈 수도 있을 텐데.


"저 처음 보는데 믿으실 수 있겠어요?"


"사람이 사람을 믿어야지. 그럼 누굴 믿겠어."


사람이 사람을 믿는다. 익숙하면서도 참 낯설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세상에 많은 문제들이 사람을 잘못 믿었다가 발생하는 것 아닌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존재이므로 사람을 믿는 것은 분명 선천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본성이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많은 불의를 마주하고 겪으면서 사람에 대한 불신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갈 뿐이었다. 이익은 둘째치고 생존을 위해서라도 남을 의심하는 것이 유리한 법이다. 생각지 못한 말에 맞닥뜨리면서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급히 감사하다는 말만 남긴 채로 집으로 돌아왔고, 그 믿음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 다음 날 바로 지불했다.


고작 5,000원 외상으로 무슨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처럼 말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렇다. '주변 사람들이 뭘 그런 걸 갖고 그래'라고 할 정도로 너무나 사소한 일이었다. 그러나 노자가 그랬던가. 작고 사소한 것에 진리가 담겨 있다고. 그것은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진리였다. 불의가 판치고 불신이 가득한 요즘 세상에 가장 필요한 말일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불신을 극복할 방법은 대상을 향한 신뢰인 것이다.


나는 평소 의심이 많고 사람을 잘 믿지 않는 편이다. 그 한 마디가 지금까지 뇌리에 남을 정도로 인상은 깊었지만 특별히 나 자신을 변화시키진 못했다. 그 찰나의 순간이 수십 년 다져온 견고한 사고를 깨뜨린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그러나 분명 가슴속 깊이 어디선가 따뜻해지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그 따뜻함은 아직도 내 안에 어딘가에서 작은 불씨로 남아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 지금 이렇게 글로 표현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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