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입사하고 맨 처음 그룹 연수를 받았을 때 교육 담당자가 인상 깊었던 말을 했었다. 당시 금융사끼리 모여서 교육을 받았었는데 그 날 처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왁자지껄하며 활기차서 마치 서로가 알던 사이인 줄 알았다는 것이다. 물론 그 날 서로 대부분이 모르는 사이였다. 그렇지만 너나 할 것 없이 옆사람과 이야기를 주고 받는 모습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내가 봐도 신기하긴 했다. 이렇게 적극적이고 외향적인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라니. 물론, 처음 받는 그룹 연수다보니 서로 빨리 알아가려는 마음이 커서 모두들 마음에도 없는 적극적인 태도를 취한 것도 있었겠지만.
금융사 특성 같기도 한데 일단 전반적으로 말을 잘하는 사람이 많다. 자세히 보면 말을 잘하는 모습도 참 다양하다. 온갖 표정과 몸짓을 동원해 가면서 실감나고 생생하게 순간을 묘사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논리적으로 차분하게 상대방이 이해하게끔 메시지를 잘 전달하는 사람도 있다. 전자 쪽의 자질을 가진 사람은 주변 사람들의 몰입을 극대화 하는 경향이 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입이 근질근질해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사람들이 얘기를 하면 도중에 끊는 사람이 잘 없다. 보통 이야기를 참지 못하고 딴 소리를 하거나 주제를 바꾸려는 사람이 나타나기 마련이지만 모든 사람이 한 마음으로 그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하는 것이다. 물론 기본적으로 재미가 보장되어야 하지만, 그 재미를 만들어내는 것도 이야기보다는 사람의 영향이 크다.
후자 쪽의 자질을 가진 사람은 일단 말을 길게 하지 않는다. 최대한 논리적으로 얘기함으로써 군더더기 없이 메시지를 정확히 표현한다. 이외에 가끔 재미없는 이야기를 길게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냥 말이 많은 사람이다. 눈치 없이 아무도 듣지 않는 얘기를 혼자 오랫동안 하기도 한다. 다른 데 터놓을 곳이 없어 여기서 이러는건가 싶은 생각이 들어 나는 그런 사람의 말도 열심히 경청하는 편이다.
아무튼 말 많은 사람을 제외하고 처음에 언급했던 두 가지 스타일 중에 고르자면 아마 나는 후자 쪽에 가까운 것 같다. 말할 때마다 항상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있는데 한 번 말할 때 30초 이상은 말하지 않는다. 꼭 상대방과 티키타카가 되어야 한다. 상대방이 내 말에 응수해야만 내가 다시 말을 이어하는 스타일이다. 다르게 말하면 상대방 눈치를 살펴가며 말하는 스타일이다. 왜 그런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말로써 사람들의 집중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는 내면의 두려움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회의할 때도 필요한 말만 하고, 프리젠테이션을 할 때도 군더더기 없이 이야기하는 편이다. 항상 문장을 애매하게 끝내는 법 없이 마무리를 짓고, 의미 없는 의성어는 덜 사용하며, 문장 중간에 목적어는 생략 없이 말하는 편이어서 그런지 나름 말을 잘한다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말투가 아쉬울 때가 있다. 술자리 모임이나 지인들을 만났을 때 무언가를 재미 있게 얘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완전 핵노잼까지는 아니지만 같은 이야기도 더욱 맛깔스럽게 하는 친구들이 있다. 처음에 언급했을 때 전자에 속하는 타입들이다. 분명 같은 경험을 했는데 그 친구가 말하면 왜 이렇게 반응이 좋은지. 나도 너무 닮고 싶어서 나름 그 친규를 유심히 살펴보며 말투를 분석한 적이 있는데 일단 문장의 길이와 호흡이 대체로 짧다. 시선은 모두에게 골고루 향하며 표정과 손동작이 확실히 크게 움직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같은 경험을 굉장히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세하게 기억하는 만큼 자세한 묘사가 가능하다. 나는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여 기억 저편에 날려버린 것을 그 친구는 적절하게 사용하여 이야기의 궁금증을 일으킨다. 궁금증이 발생하니 자연적으로 사람들은 그 이야기에 몰입한다.
솔직히 그 능력이 부러웠다. 그래서 나도 일부러 더 오바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눈을 더 크게 부릅뜨고 손은 여러 군데로 막 뻗어나갔다. 말의 크기와 빠르기도 조절하면서 이야기를 생동감 있게 표현하려고 했다. 그러나 역시 디테일이 부족했다. 내용이 없으니 재밌는 말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예를 들어, 나는 단순히 편의점에 가서 컵라면을 샀다고 얘기한다면, 누군가는 여기에 무엇을 타고 갔는지, 날씨는 어땠는지,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까지 묘사하는 것이다. 같은 것을 보고도 결코 같은 것을 본 것이 아니다. 나는 그런 사람과 다르게 본 것을 다르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느꼈다.
일부러 말을 잘하기 위해 그런 모습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타고난 환경 혹은 자라난 환경의 차이에 기인한 것이라 여긴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사실 그렇게 말해보고 싶었다는 것은 엄밀히 말해 관심을 받아보고 싶은 욕심도 있던 것 같다. 그렇게 대화를 주도해가는 사람은 분위기상 그쪽으로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말을 하지 못하는 나는 관심을 받기보다는 주는 쪽을 택했다. 대화의 목적은 결국 즐거움이고, 우리는 관심의 양과 상관 없이 해당 시간을 즐겁게 보내는 데 중점을 두면 되는 것이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 나는 이미 졌고, 승패는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