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석도쿠 Jan 08. 2021

나를 정의한다는 것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쓴 글을 읽는 사람은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살면서 생각보다 다양한 글을 써왔다. 초등학생 때는 일기를 썼고, 중·고등학생 때는 무협소설을 구상했으며, 대학생 때는 책이나 영화 리뷰 작성 및 시나리오 창작에 몰입하고, 직장인 때는 브런치, 인스타그램을 통해 일상적인 글을 기록했다. 심지어 회사 내 사내 게시판에 서면 인터뷰를 쓴 적도 있다. 글을 열심히 쓰기 위해 노력한 적은 없다. 다만 손에서 놓지 않았을 뿐이다.


그 글들은 모두 나를 대변하고 있을까. 분명 그렇지 않다. 과거에 쓴 글들을 읽다 보면 생각이 바뀐 부분이 많다. 나의 삶을 대하는 태도가 결코 안주나 정착이 아닌 도전과 변화에 중점을 두었기에 매년 달라질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 그래도 내가 살아온 삶의 흔적임은 분명하다. 지금의 생각은 한순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 기존의 생각에 새로운 생각을 엎고 계속해서 누적하여 쌓아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쓴 글들이 현재의 나를 완전히 대변할 수 없어도 내 삶의 궤적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내 글을 모두 읽은 사람이 있다면, 아니 굳이 글을 읽지 않더라고 나는 어떤 사람으로 비추어지고 있을까. 주변 사람들은 나를 확실히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얘기한다. 속을 잘 모르겠다는 얘기도 들어봤다. 사람들이 흔히 예측하는 행동 패턴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라고 조심히 추측해본다.


클라이밍과 주짓수 같은 다소 거친 운동을 좋아하지만, 집이나 카페 같은 조용한 공간에서 사색을 즐기며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행위를 좋아한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멋들어지게 발표하거나 다양한 행사에서 마이크를 잡고 사회 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모임은 5명 이내의 소수와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것을 선호한다. 다양한 맛집을 찾아가는 것을 좋아하지만, 집 앞 편의점에서 주먹밥과 컵라면을 사 먹어도 충분히 만족한다.


말이 없는 상대에게는 말을 많이 하는 편이며, 말이 많은 상대 앞에서는 말수를 줄이는 편이다. 시와 아름다움, 낭만을 찾는 감성파이기도 하지만, 현실에 대한 인식은 객관적이고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는 편이다. 하루 세 끼 이외의 간식을 잘 먹지 않지만 일주일에 2번 이상 저녁으로 치킨은 꼭 먹는다. 생선, 회 등은 잘 먹지만 오징어와 낙지, 주꾸미, 꼴뚜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다리가 4개를 넘어서는 동물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 혹자는 동족이라고 못 먹는 것 아니냐고 놀리기도 하는데 순간 말문이 막혀 부분적으로 인정한 것처럼 되어버렸다.


연극, 영화 제작, 자전거 여행, 히치하이킹 등 타인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겁 없이 도전하면서도,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하는 마음을 온전히 내보이지 못하는 겁쟁이 같은 면모도 있다. 무언가 상반된 듯하면서도 양립해도 큰 문제없는 성질의 것들을 갖고 있다. 그러나 어느 한쪽에 무게를 많이 두는 순간, 나에 대한 판단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우리는 누군가를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한다. 불확실성을 줄이는 방법으로 행동 패턴을 예측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대체로 일관적인 사람들은 어떤 메커니즘과 같이 인풋과 아웃풋이 비교적 명확하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재미없는 삶을 살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사실 엄밀하게 따져서 일관된 사람은 없다. 우리에게 기본적으로 내재된 성질이 외부 상황과 맞닥뜨렸을 때 화학 약품처럼 반응한다. 특히 요즘 같이 빠르게 변화하는 시기에 우리는 다양한 상황을 마주하고 그에 대처하는 행동은 매번 다를 수밖에 없다. 일관적인 태도를 보이기 쉽지 않은 이유이다. 경제학의 기본 가정인 '인간은 합리적이다'가 틀렸기 때문에 행동경제학이란 학문이 등장한 것처럼, 일관적인 패턴을 예측하는 행위가 깨지고 새로운 분석 방법이 등장할 수도 있다.


내가 눈에 띄는 부분에서 여러 모습들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지, 사실 모든 사람들이 자신만의 특이한 모습들을 지니고 있다. 비슷한 듯하면서도 결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체할 수 없듯이 우리는 그렇게 자신만의 모습으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돌아와서, 다양한 모습을 지닌 나를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정의하겠다면 한 단어로 축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학생(學生)'이다.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생을 배운다는 것이다. 생이란 곧 삶, 삶을 배운다는 것은 더 많이 알아가겠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삶의 수많은 모습들을 감내하고 수용하겠다는 것이다.


알베르 까뮈의 저서 <전락>에서 나온 구절로 글을 마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나는 삶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내 약점이지요. 삶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어떤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하니까요."



매거진의 이전글 백종원 씨는 조리사 자격증이 없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