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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도쿠 Feb 24. 2021

러라밸, 씁쓸하긴 하지만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러라밸'이란 말이 있다. '러브 앤 라이프 밸런스'의 줄임말로 사랑과 삶의 적절한 균형을 의미한다. 사랑에 모든 것을 걸지 않겠다는 것이다. 삶에 필요한 취업, 스펙, 여행, 취미 등을 적절히 챙기면서 사랑은 양념 같이 뿌려주는 것이다. 굉장히 똑똑한 사랑의 방식이다. 사랑을 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사랑은 무한한 기쁨을 가져다주지만 결코 영원하지 않으며, 오히려 더 큰 아픔과 고통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대학생 때 사랑에 올인하다가 학점, 관계, 스펙을 놓치고 뒤늦게 후회하는 경우도 많다. 사람들은 현명해진 것이다. 사랑이 밥 먹여주지 않는다는 것을 일찍 알아버렸다.


사랑 예찬론자들도 알 것이다. 영원토록, 언제까지나, 이 세상 끝까지, 항상 변하지 않고 사랑한다는 얘기는 노랫말 속에서나 나올법한 얘기란 것을 말이다. 시인들의 언어도 사랑을 아름답게 묘사하지만, 사실 시인들의 사랑도 우리 보통 사람들이 하는 사랑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어쩌면 우리는 환상 속에서 속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이 이 시대의 지상 명령인 것처럼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해야만 하는 것처럼 말이다. (리처드 도킨스의 말을 빌리면 유전자의 명령일 수도) 인생 최고의 가치인양 사랑을 저 하늘 높이까지 치켜세운 것이다. 그러면서도 막상 아무도 그렇게까지 사랑을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사실 러라밸이란 말을 듣었을 때 좀 아쉬웠다. 사랑만큼은 삶의 불안과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로웠으면 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의 과거를 떠올려보니 그런 말을 할 처지가 못되었다. 나야말로 전형적인 러라밸의 광신자였던 것이다. 취업을 위해서 연애는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고, 당장 내가 쌓아야 할 스펙을 위해 데이트를 미루었다. 내 목표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연애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만나고 헤어질 것이라면 그 시간은 매몰비용 밖에 되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결국 원하는 기업에 취업했고 안정적인 커리어를 잘 쌓고 있다. 그렇게 살고 있는 지금, 오히려 자기 파괴적인 충동이 피어오른다. 아무것도 재지 않고 열렬하게 사랑해보고 싶은 것이다. 한 번 전화를 하면 몇 시간이 끊을 줄 몰랐던, 상대방만 생각하면 가슴이 뛰어 잠을 이루지 못했던 20대 시절이 그리웠다. 그러나 현실적이지 못한 선택이란 것을 너무나 잘 안다. 사랑 하나만 믿고 열심히 살아왔던 사람이 오랜 시간 잘 사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좋았을걸. 생각보다 그런 사람은 많지 않다. 다투고 상처 주고 데면데면한 정도면 양반이다. 서로 못 잡아먹어서 철천지원수까지 되는 경우도 널렸다. 사랑을 벗어나서는 다시 현실이기 때문이다. 한 연예인은 사랑도 생활고는 못 이긴다고 했고 실제로 많은 이들이 공감했다.


사랑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생에 사랑이 전부라는 생각은 드라마 속에서나 등장한다는 것이다. 사실 요새는 드라마에서도 사랑이 전부는 아닌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러라밸은 지금 시대에 딱 맞은 합리적인 사랑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앞으로도 러라밸을 선택할 것이고 계산기를 두드리며 사랑을 할 것만 같다. 사랑이 주는 낭만에 아쉬움과 씁쓸함의 재를 뿌린 것만 같지만 어쩌겠는가. 사랑 위에 또 현실이 있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그럼에도 마음속 한편에서는 사랑에 모든 것을 걸어보고 싶은 불씨가 조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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