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날개에 있는 저자 소개란이 마음에 들어 혼자 중얼거렸다. ‘나도 나중에 이렇게 써야지. 근데, 뭐라고 쓰지?’ 지금 당장 생각해내야 할 과제처럼 혼자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제발 복권에 당첨 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원하는 사람한테 신이 다가가서 말했다.
“이놈아, 제발 복권이라도 좀 사고 기도하든가 해라!”ㅋㅋㅋ(마치 나한테 말하는 듯~)
‘저런 이야기쯤은 나도 쓰겠는데…….’
그런 오만한 마음으로 책상 앞에 앉았는데, 내가 한 거라곤 깜빡대는 커서만 쳐다보는 게 다였다.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도 몰랐다.
이상한 건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목이 뻐근하고 등줄기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뭘 했다고? 도대체 뭘 했다고? 뭘 하긴 했지. 깜빡이는 커서에 대고, 몇 글자 쓰고 지우고, 또 몇 글자 쓰고 또 지우고…… 글자 연습하는 것도 아니고.
사실 글자 연습도 필요했다. 활자를 통해 읽을 땐 별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말 한마디도 내 손을 거쳐 나가면 정말 이상했다. 어색하고, 어법에도 어긋나고, 앞뒤 문맥도 안 맞고, 맥락도 없고…….
이 짓을 수차례 하는 동안 깨달았다. 오만은 무지에서 나온다는 걸.
그런 반복을 일삼다가 처음으로 이야기를 완성(?)하자, 내 속에 있던 몹쓸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풍선처럼 부풀었다.
그럴 만도 했다. 처음이니까! 원래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거니까. 생전 처음으로 원고를 써서 출판사에 보내본 거니까. 큰일이라면 큰일이었다.
섣부른 상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저절로 해결됐고, 부풀었던 환상도 금방 터져버렸다.
‘그랬단 말이지. 한 번 했는데, 두 번 못하겠어?’ 오기가 발동해서 다시 시작했다.
연습을 능가하는 게 없다고 하더니, 그새 한번 써봤다고 이번엔 목이 결리거나, 등뼈가 아프지도 않았고, 쓸데없이 식은땀이 흐르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글이 술술 써지는 건 물론 아니었다. 어찌어찌해서 한 꼭지 썼다 싶으면, 그다음이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이야기가 도무지 나갈 생각을 안 했다.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한참을 헤매다가 어떤 실마리 하나 툭 떠올라 막 풀어내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그럴 때면 묘한 희열이 느껴졌다.
‘그래, 작가들이 이랬댔어. 이야기 속 캐릭터가 작가의 의도와 달리 이야기를 막 끌어간다고……. 뭐야, 이 기분! 나 벌써 작가 된 거? 오 마이 갓!’
착각에 사로잡히는 건 순식간이고, 핑크빛 상상은 언제나 달콤했다.
어떤 날은 이야기 속 인물에 빠져서 울분을 토하기도 하고, 눈물까지 찔끔거렸다. 처음 이야기를 쓸 때와는 분명 다른 느낌이었다. 괜찮은 조짐이었다.
감정에 한껏 몰입해서 긴 이야기를 써냈다는 짜릿함 때문이었는지, 두 번째 이야기를 끝냈을 때 그 뿌듯함은 정말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하늘을 날듯 마음이 붕붕 떠다녔다.
이번엔 공모전에 보냈다. 공모전 발표까지는 시간이 길었다. 김칫국 마시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그때 처음 알았다. 공모전 결과 발표 전에 이미 모든 게 끝났다는 걸. 별도의 전화 연락이 없으면, 공모전 발표 날짜를 손꼽아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걸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근데, 이거 너무 한 거 아냐? 그럼 처음부터 공모전 하단에 써 놓든가 했어야지. “발표 날짜는 의미 없습니다. 당선자는 미리 전화 연락 갑니다. 연락 없으면 기다리지 마세요.”라고. 달력에 동그라미 쳐놓고 저 혼자 마음 졸이며 기다리게 하면 안 되잖아. 얼마나 바보 같아 보이는데. 그럼 안 되는 거잖아ㅠㅠ
거기서 말았으면 됐을 텐데. 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여기저기 투고했다. 거절 답신도 여러 번 받으니 견딜 만했다. 어떤 곳에선 당최 읽지를 않았다. 원고를 보낸 사람이 수신확인 해놓고 틈틈이 열어본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몇 날 며칠이 지나도 ‘읽음’으로 바뀌지 않았다.
어느 날 메일을 열고, 얼마 안 돼서 ‘읽음’으로 바뀌었다. 정말 찰나였다. 순간 손에서 땀이 나고 가슴이 벌렁댔다. 그러는 사이 답장이 왔다. “원고 잘 읽었습니다만……” 거절이었다. 근데 좀 이상했다. 메일 확인과 답장 보낸 시간 차가 겨우 1분이었다.
‘원고를 읽었다고? 진심? 무슨 능력으로 그 긴 원고를 1분 만에 해치울 수 있지? 그대는 1분도 될까 말까 하는 시간에 그걸 다 읽어내고, 부적합 판단을 내릴 재주를 지녔다고?’
메일을 다시 열었다. 답장을 눌렀다. 그쪽에서 읽든 말든, 무시하든 말든 할 말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이 앞서다 보니 글이 두서없었지만, 상관없었다.
"누군가에게는 형편없이 보이는 글일지는 몰라도 당사자에게는 공들여 쓴 소중한 글입니다. 글이 부족해서 출판할 수 없다는 말씀은 아프지만,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낸 글을 여태 읽지 않다가 수신확인 1분 만에‘출판 불가’라는 메일을 보내는 능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어떤 대단한 능력이 있기에, 여기 편집인은 채 1분도 걸리지 않은 시간에 글을 다 읽어내고, 판단하고, 불가 메일을 보내는 일을 다 해내는군요!
누군가의 글을 함부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책을 만드는 소중한 일을 한다고 여기고 싶지 않습니다. 제발 저의 오해이기를 바랍니다."
보내기 버튼을 꽉 눌렀다. (그날 보낸 메일 내용을 지난 일기장에서 찾았다. 흥분한 거 치고는 꽤 차분하게 잘 쓴 듯ㅋㅋㅋ)
부리나케 전화벨이 울렸다. 출판사였다. “착오가 있었다고, 담당자의 실수였다고.” 난 “알겠다고, 이렇게 정정 전화 주셔서 감사하다고.” 답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나, 실수였다는데. 나도 허구한 날 해대는 실수를 그들이라고 안 할 리 없고.
모든 출판사가 다 이런 건 아니었다. 개 중엔 친절하게 어떤 부분이 미흡한지 깨알같이 피드백해주는 곳도 있었다. 바쁘실 텐데. 참 감사했다. 단 한 곳뿐이었지만.
그리고 한참 후, 그때 쓴 내 이야기를 다시 읽으면서 허점투성이고, 강한 끌림도, 어떤 재미도 없다는 걸 알게 됐다. 그동안 ‘동화읽는어른’에 참여하면서 꽤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읽은 건 ‘새 발의 피’였다. 닥치는 대로 읽다가 보니 내 글의 위치와 수준이 눈에 들어왔고, 내 글에 대한 과대망상이 사라졌다.
이것 또한 성장이라고 믿는다. 누군가 그랬다, 예전에 썼던 글에서 부족한 점이 보였다면 부끄러워 말라고, 당신이 그만큼 발전했다는 증거라고.
어느 작가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24살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서 공모전에 계속 떨어지다가 15년 만에 소설 상을 받으면서 등단했다고 했다. 떨어지는 게 반복되면서 이렇게 불행하게 살 필요가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면서 글을 두 번 다시 쓰지 않을 거라는 결심도 했다고. 그렇지만, 마음 한편에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남아 있어서…….”
세월의 깊이와 연습의 두께가 나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나의 시간과 노력이 너무 초라해서 부끄러웠다.
언젠가 한 동료가 교육청에서 주관하는 동화 쓰기에 한번 참여해보라고 제안했다. 입으로는 고맙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좀 시큰둥했다. 그때 금방 기회가 오지 않은 게 참 다행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콧방귀까지 뀌었으니까. 신은 교만한 인간을 상대하지 않는다고. 나중에 다시 기회가 왔을 땐, 그저 감사할 따름이라며 두 손 가득 공손하게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단편 동화를 몇 차례 썼다.
길은 여전히 멀다. 어쩜 요원할지도 모르겠다. 커서만 깜빡이는 화면을 볼 때면 더욱 그렇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야기는 갈 곳을 모르고 방황하고 있다ㅠㅠ
“이야기를 좋아하고 재밌는 이야기꾼이 되기를 늘 소망합니다.”
핑크빛 환상에 사로잡혔을 때 생각해놓은 작가 소개말이다. 언젠가 책날개 저자 소개란에 꼭 들어가길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