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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possible Jan 07. 2016

딸기우유가 먹고 싶은 날

'오늘의 탈'을 벗고 싶은 그런 날.

그런 날.

그런 1. 관형사- 상태, 모양, 성질 따위가 그러한.
        2. 감탄사- 뜻밖에 놀라운 일이나 딱한 일을 보거나 들었을 때 하는 말. 

관형사 '그런'을 '어떠한 시절이나 때'를 뜻하는 명사 '날'앞에 서도록 한다.



그런 사람, 그런 생각, 그런 일 등등 '그런'은 다양한 단어를 가리지 않고 수식하지만 유독 '날'을 만났을 때 그 친근감이 증폭된다. 단 1g의 수고가 없어도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하루하루 이기 때문일까.


아무도 가지지 않은 적이 없기에 '그런 날' 은 이 세상 사람들의 수만큼 많고 다양할 것이다. 그렇기에 긍정이나 부정, 특정 방향의 분위기를 띄지도 않는다. 


헌데 나는 주로 좋지 않은 상황을 만났을 때 그 세 글자를 소환한다. 아무리 안 좋은 상황도 '그런 날'로 이름 붙이면 신기하게 '보통 이하'로는 떨어지지 않는 마지노선이 생겨버리고, 제 3자의 시선이라 가능한 '애잔함'까지도  불러일으키게 한다.



그런 날이 있다. 딸기우유가 먹고 싶은 날이 있다.


퇴근길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고 비로소 지상으로 올라와 찬 공기를 마신다. 동굴 속의 해방감도 잠시 집까지 옮겨야 할 걸음이 적지 않다. 괜히 스커트를 입어서 매끄러운 스타킹과 딱딱하게 굳은 구두 가죽은 자꾸 헐거운 착용감을 발에게 선물한다. 별수 없이 앞 발가락에 힘을 주며 길바닥에 구두를 끌다시피 속력을 낸다. 거리 상점에서 시끄럽게 흘러나오는 최신가요에도 수많은 얼굴들을 지나치면서도 귀와 눈은 누가 '있다'라고 말해주기 전까지 그 존재를 알아차릴 수가 없다. 드디어 직진행보에 제동이 걸릴 문을 만나 4자리 숫자를 두 차례 누르고 한 시간 가량의 여정을 끝낸다.




더 이상 갈곳은 없는데 내 머릿속은 그렇지가 못한가 보다. 오늘 나의 행적을 쫓아 부유하기 시작한다. 오늘의 아프고 힘들었던 장면을 몇 개의 클립 영상으로 만들어 재생하기에 이른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던 오전의 그래프는 작은 실수를 만나 출발을 알리고 적당한 실수로 점프를 한다. 나 때문에 늦어지는 동료의 일처리에 미안함이 쌓이고, "감정을 숨기지 못하면 다 힘들어진다."는 상사의 면담으로 최고점을 찍는다.


오늘의 복기는 필요하다. 그래야 내일은 '똑같은 잘못'은 하지 않고, '잘했던 일'은 반복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과거에서 배운다.' 따위는 그만하고 싶을 때도 있다. 


그때 난 인형탈이 벗고 싶다. 있지도 않은 인형탈을 벗어볼 수 있었으면 한다. 

오늘의 때 묻은 인형탈을 벗어서 흥건하게 젓은 땀도 말리고, 더러워진 부분도 솔로 빡빡 문지르고 싶다. 

그래서 내일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새로운 탈을 쓰고 다니고 싶다.


오늘의 인형탈을 벗을 수 있었으면.

오늘의 '미련해서 한심스럽고 밉고 싫었던' 탈을 벗을 수 있었으면.


그래도 아직 내 존재를 부정할 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까 '인형'이 되고 싶진 않다.

멋지고 잘난 다른 사람으로 평생을 살아가고 싶진 않다. 그저 조금은 못나고 두 번 세 번을 해도 불안하고 타고난 발랄함도 없는 나로 살고 싶다. 다만 브루마블의 황금열쇠가 나올 때처럼 아주 주사위를 잘 던졌을 때 한 번은 나의 인형탈을 하루만 벗었다 쓸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다.





벗을 인형탈도 없다는 걸 잘 아는 그런 날, 나는 내가 싫어하는 음식이 먹고 싶어진다.

언제부터인가 울컥하는 감정을 뱉어 내지도 삼키지도 못하면 그저 밀어 넣게 됐다. 딸기우유와 함께.


어릴 때부터 흰 우유는 좋아해도 딸기우유는 싫어했던 나였다. 처음 먹었던 딸기우유 한 모금의 잔상은 비렸다. 내 입맛이 이상한 것이겠지만 생선도 아닌데 나는 비린 맛을 느꼈다. 하얀 우유에 인위적인 핑크색을 넣는다는 게 보기에는 이뻐도 먹을 땐 거부감이 들었고, 인공향은 현기증을 느끼게도 했다.


그렇게 내 몸은 딸기우유를 밀어내는데 내 마음은 그것을 잡는 이유,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면 '나 아닌 다른 내가 되는 가장 빠른 방법'이 딸기우유 마시기였던 것 같다.

한 시간 만에 키가 10cm나 커질 수도 없고, 없던 애교가 생길 수도 없고, 못하는 영어회화가 술술 나올 수도 없지만 못 먹던 걸 먹을 순 있다. '원래 나는 딸기우유를 싫어하지만 다른 나라면 딸기우유를 마실 것이다.'라는 생각.


오늘 내가 많이 싫어졌구나, 오늘 너는 힘들었구나, 지금 이 순간은 내일을 생각하기 싫구나. 

남들이 술을 들이키면서 하는 생각들을 난 딸기우유를 마시면서 하는구나.


편의점에서 사 온 항아리 딸기우유 두 개. 

오늘은 하나만 먹고, 하나는 될 수 있으면 먹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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