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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possible Dec 20. 2015

소중한 것들의 최후

아끼면 케빈의 롤러스케이트가 된다

난 문방구를 참 좋아했다. 특히나 겨울이면 더욱 그랬다. 버스를 타고 30분이나 가야 했지만 난 겨울이면 학교 앞 문방구를 제쳐 두고, 시내에 있는 3층짜리 대형 팬시점으로 향했다. 작은 도시에선 좀처럼 느끼기 힘든 활기찬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그곳엔 가득했기 때문이다. 형형색색의 필기구와 노트, 필통 등의 학용품에서부터 아기자기한 생활소품까지 어린 여자아이가 좋아할 모든 것은 다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빈 손으로 돌아오는 날이 손에 꼽던 나이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부턴가 나의 걸음은 뚝 끈겼다.


나는 그렇게 열렬했던 나의 문구류 사랑이 갑자기 식어버린 이유를 일말의 고민 없이 '모든 게 유치해 보이는 사춘기'로 단정 짓고 살아왔다. 그런데 열한 번째  <나 홀로 집에>를 보면서 뜬금없이 그 이유가 다는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마스의 상징이 되어버린 그 시리즈를 족히 열 번은 봤을 터인데 열한 번째 본다고 달리 보이는 건 아주 많이 이상했다.


뉴욕에서도 어김없이 도둑을 소탕하는 < 나 홀로 집에 2 >의 케빈은 우연히 비둘기 아줌마를 만나고 그녀와 마음으로 친구가 된다.

 

배신당할까 봐 두려워서 사랑을, 사람을 믿지 못하겠다는 그녀에게 케빈은 말한다.



어렸을 때 롤러스케이트가 있었는데 난 상자에 모셔두기만 했어요.

망가질까 겁이 나서 방 안에서 두 번 정도 타기만 했죠. 

그러다 보니 어떻게 된 줄 알아요? 
발이 커져서 들어가질 않았어요. 

감정을 숨겨두면 내 스케이트처럼 되고 말 거예요. 

쓰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는 거잖아요.





케빈은 롤러스케이트 타는 것을 분명 좋아했을 것이다. 하지만 타지 않았다. 

 왜? 왜 그렇게 원하던 것을 갖게 됐는데도 보기만 한 걸까...


'신발 가죽에 스크래치가 나지는 않을까, 더러운 얼룩이 묻지는 않을까, 혹여나 바퀴가 빠지지는 않을까 '

막상 갖고 나니 생각지 못한 걱정들이 몰려왔을 것이다.


또 한편으론 좋아해서다. 아마 너무 소중하니까 그래서 타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게 있어서도 무언가를 좋아하는 방식은 케빈과 닮아 있었다. 가만히 지켜보는 것. 닮은꼴을 인정하고 나니 10년 전 이사 오면서 버렸던 낡은 책상의 두 번째 서랍이 기억 속에서 소환됐다.


그 두 번째 서랍은 다른 서랍들과는 달랐다. 가장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것들만 넣어 두는 칸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값비싼 것들도 아니었는데 당시 나의 보물은 편지지, 스티커, 사탕 같은 것들 이었다. 이사를 위해 짐 정리를 하던 어느 날, 너무 예뻐 나중에 쓰겠다고 상자에 넣어 열어 보지도 않았던 것들이 드디어 책상 밖으로 나오게 됐다. 하지만 이내 쓰레기통으로 들어가 버렸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쓴다고 아껴둔 편지지는 종이가 누렇게 변색돼 빛이 바랬고, 작은 유리병에 담겨있던 사탕들은 이미 찐덕하게 녹아 껍질에 붙어서 벗겨지지 조차 않았으니까. 가만히 지켜만 보다가 사라진 내 소중한 것들이었다.



롤러스케이트와 내 보물은 같은 신세였다.


'씽씽 달리라고 있는 롤러스케이트, 글을 쓰라고 있는 편지지, 먹으라고 있는 사탕'


그 물건의 주인들은 사랑하는 대상이 아무런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제 기능을 하지 못해서 그 대상이 뿌듯함을 느낄 수 있는 순간까지 앗아가 버린 건 아닐까.



그렇게 소중히 여긴 것들을 내 손으로 버린 순간,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바로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비를 사랑한다고 잡아서 곁에 두겠단 마음은 사랑을 처음 겪는 어린아이의 것일지 모르겠다. 여러 번 나비를 잡아본 어른이라면 나비를 잡기보다 오랫동안 하늘을 날게 둘 것이다. 하늘을 날 때 나비는 가장 아름답고 날지 않는 나비란 아무런 의미가 없단 걸 깨달았을 테니까. 그래서 소유하지 않고 하늘을 나는 모습만 지켜봐도 기쁠 것이다. 무언가를 소중히 여기고 싶다면, 품속에 가둬두는 것은 잘못된 것이란 걸 깨닫는다. 그 대상이 날 수 있도록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나는 이제 바라만 보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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