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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possible Mar 28. 2016

동상이몽

서로 다른 기억은 슬프다

성공한 사람들이 강연을 하는 방송을 본 적이 있다. 그런 프로엔 대략 이런 류의 사람들이 나온다. 벤처기업 CEO나 인기 있는 소설의 작가, 연매출 5억의 쇼핑몰 대표. 그들은 아주 젊거나 전혀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거나 사업 초기엔 빚을 지기도 했을 것이다. 특별한 사연이 있거나 우여곡절을 딛고 일어서야 나올 수 있는 곳이니까.


내가 본 날에는 영어강사가 나왔다. 진행자의 소개로 30대 중반의 잘생긴 남자가 스튜디오 중앙에 섰다. 그의 얼굴이 클로즈업되고 간단한 프로필이 자막으로 떴다. 낯익은 이름과 익숙한 얼굴. 나는 그가 누군지 바로 알아차렸다. 왜 몰라 보겠는가. 내가 좋아했던 사람인데. 그에겐 '가수 출신'이란 수식어가 붙었다. 그는 내가 중학생 때 열렬히 사모한 그룹의 멤버였다. 여러 명 중에서도 내가 콕 찍은 오빠.


학교 축제에서 노래를 부르다 매니저에게 캐스팅됐다는 그는 가수가 꿈이 아니었다고 했다. 연예인 제의가 오자 노래하는 것도 좋아하고 호기심도 생겨서 가수가 되기로 했다. 열심히 준비했지만 생각만큼 반응이 좋지 않았고, 제작사는 돈 되는 일만 시켜서 방송은 몇 번밖에 나갈 수 없었다. 그래서 끼니를 때우기도 힘든 생활고에 시달리다 결국 뿔뿔이 흩어져 다른 길을 갔다. 제대 후 썩 잘하지 못했던 영어에 죽을 듯이 매달린 끝에 지금은 인정받는 강사가 되었다. 이것이 그의 스토리다. 


나는 그가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색다른 변신과 성공에 박수가 처지지 않았다. 오히려 배신감이 들었다. 

그는 힘들고 배고픈 시절로 회상하는 그때가 나는 마냥 설레고 좋았으니까. 팬미팅에 가서 사인도 받고 사진도 찍고 선물도 주며 "훌륭한 가수가 되겠다."는 그의 바람을 같이 빌어주었으니까. 공연을 보러 가면 늘 기분 좋은 웃음으로 고맙다고 했으니까. 가난하고 괴로웠어도 팬인 나는 몰랐으니까.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서로 다른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 나한테는 느껴보지 못한 쓰라림으로 다가왔다.



문득 조용한 겨울바다의 기억이 차올랐다.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모래사장을 함께 걸었던 그 사람은 어땠을까. 깜깜한 하늘과 바다를 보며 철석 거리는 소리가 듣기 좋다고, 이 순간이 멈춰버리는 것도 좋겠다고 입 모아 말했는데. 속으로 그는 좋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행복했는데 옆에 있던 그 사람은 다르게 기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단 1초도 해본 적 없는 상상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봐버렸다.


기억을 하지 못하는 친구도 이와 비슷한 종류의 감정을 느끼게 했다. 

고등학생 시절 친구 부모님이 이틀간 집을 비우신 어느 날, 그녀와 나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군것질을 하며 비디오 두 편을 내리 보다가 잠이 들었다. 신기하게도 그날 본 영화 제목을 난 모두 기억하고, 그녀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도 떠올리지 못한다. 20살 겨울 처음 명동에 갔던 날도 그녀와 함께 찍은 스티커 사진이 나의 옛 다이어리 어딘가에 붙어 있는데, 친구는 그 스티커가 만들어지는 속도만큼 빠르게 그 기억을 잊어갔다. 


한 가지 사실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은 사실이 생겨난 당시에는 같았을까. 그런데 시간이 흘러 기억이 변한 걸까. 아니면 그 순간에도 이미 몸과 마음은 다른 곳을 바라봤을까. 내가 좋아했던 가수에게 물을 수도 없고, 지나간 사랑에게도 물을 수 없어서 별수 없이 나는 친구에게 물었다. 전화를 걸어 비디오와 스티커를 설명하며 말했다.


넌 왜 즐거웠던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냐고. 실은 그때 즐겁지 않았던 건 아니냐고.

나는 이렇게 똑똑히 기억이 나는데 어떻게 한 사람의 기억만 온전하고, 

다른 한 사람은 삭제된 메모리처럼 아무것도 없을 수가 있냐고.


친구는 말했다. "그냥 기억이 안 나."

기억이 나지 않는 걸 어쩌냐고. 그게 내 잘못이냐고. 뜬금없는 문제제기에 그녀는 해명 아닌 해명을 해야 했다.


없어진 통화 화면을 보며 생각했다.

니 잘못은 아닐 거야. 어쩌면 내 잘못일지도. 괜히 쓸데없는걸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어서.


기억력이 좋은 사람은 불행한 포식가다. 역시 모르면 장 땡이란 말은 맞았다. 아는 만큼 보이니까. 알고 있는 시간만큼 잊어 버린 이들이 남긴 씁쓸함을 고스란히 혼자서 맛봐야 하니까.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금붕어는 기쁠까, 슬플까. 망각했다는 사실마저도 금붕어는 잊을 테니 금붕어들끼리는 이런 일로 감정이 상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 방송을 보지 않았다면 나 만일진 몰라도 행복한 기억을 의심 없이 가졌을 텐데. 둘이서 밥을 먹어도 같은 메뉴를 두개 시키기보다 다른 음식을 주문해서 나눠 먹는 것을 좋아하면서,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보면 언짢아하다가도 나와 다른 색상인걸 깨닫고 참 다행이라고 안도해하면서,  왜 '같지 않음'이 '기억'이란 카테고리에 들어가자 불쾌하고 야속하고 상처받고 마음이 아플까. 


좋은 기억은 욕심이 많은 것 같다. 내가 좋으니 너도 좋았으면, 은연중에 같은 기억을 기대한다. 나만 좋은 것으론 만족하지 못한다. 반대로 나쁜 기억은 내 것 만으로 치명적이라서 다른 사람의 기분이나 마음까지 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래서 좋은 기억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더 위험할지 모른다. 추억을 떠올리며 그 순간 함께한 이들에게 자꾸 '그때 좋았지, 그때 좋았지' 하고 묻게 되니까. 어떤 이들에겐 그 물음이 지나간 불편한 감정을 고백하게 만드니까.


정답은 아니지만 이런 순간이 오면 내가 취해야 할 포즈를 한 가지 골랐다.

서로 다른 기억의 얼굴을 확인해서 슬프면 슬프련다. 먼저 확인하려 들진 않겠지만 반복돼도 무덤덤해 지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발견한 나를 자책하려 들진 않을 것이다. 지금처럼. 


애써 내가 나쁘게 기억하는 것을 다른 이는 좋게 기억할 수도 있다는 밝은 면을 보려고 노력하고 싶진 않다. 그냥 기억이 안 난다는 친구의 말처럼 슬픈 건 그냥 슬퍼해야 할 때도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억이 나와 다른 건 슬프다. 생각보다 많이. 슬프면 슬퍼하련다. 기꺼이 슬퍼하다가 좋은 기억에게 잠식당하도록, 물고기 밥처럼 떠다니다가 튼실한 기억에게 먹히도록 두고 싶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아서 열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영화 속 대사에 한 줄의 각주를 추가하고 싶다.


같은 초콜릿을 먹어도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누군 달고 누군 쓰고 누군 짜다 말할 수 있다. 

맛없게 느낀 사람이 맛있는 척할 수도 있다. 


'이런 나의 속성을 알았으니 어쩔 텐가. 그래도 나를 갖겠는가. 아니면 갖지 않을 텐가.'

기억이 도발을 해오는 듯해서 나는 갖기로 했다. 

내가 돈이 없지 기억이 없는 건 싫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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