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im possible Apr 08. 2016

보리차를 담으며

끝이 보고 싶었으니까

뚜-우. 뚜-뚜.

주전자가 운다. 주둥이에 달린 엄지손톱만 한 뚜껑이 뻐끔뻐끔 신호를 보낸다. 물이 다 끓었으니 불을 끄라고. 이제 내가 티백을 넣을 차례다. 5L 주전자에 보리차 알갱이가 든 티백 하나면 원룸 가득 구수하고 은은한 향이 퍼진다. 양이 꽤 되는 관계로 물을 식히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반나절 가량은 기분 좋은 냄새에 취해있게 된다. 일주일에 한 번, 보통은 주말 오전. 나는 물을 끓인다.


어릴 때부터 우리 집 식수는 보리차였다. 정수기가 없던 까닭도 있겠지만, 엄마는 꼭 큰 솥이나 주전자에 물을 끓여서 보리차를 만드셨다. 집에 있는 물을 마셨는데 그 물은 늘 보리차였으니까. 집 밖에 나와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떨어져 살면서부터 나는 물 마시는데 곤란함을 느꼈던 거 같다. 투명하고 아무 맛이 안나는 생수가 내입에는 영 맞지 않아서, 생수를 많이 먹은 날은 왠지 모르게 배가 아프기도 했다. 어딜 가나 놓여있는 정수기에 적응할 때도 됐건만, 어파치 물을 많이 마시는 편이 아닌 난 생수와 친해질 운명은 아니었나 보다. 


"요즘 누가 물을 끓여 먹니, 촌스럽게!" 페트병에 담긴 노란 물들을 본 엄마의 한 소리. 식성이 변했는지 귀찮아진 건지. 엄마는 더 이상 끓인 물을 먹지 않았고, 식구 중 유일하게 보리차를 챙겨 먹는 내가 탐탁지 않아서 "생수가 몸에 더 좋다더라." 카더라 정보를 옮기셨다. 촌티가 폴폴 풍기던, 건강에 좋고 나쁘든 간에 내게 맞는 내게 편한 걸 누릴 자유는 나한테 있으니까, "난 보리차 체질인가 봐." 하고 잔소리를 잘랐다.

 




하루 한번 이상은 열게 되는 냉장고. 그 속에 그득 찬 1.5L 보리차 두 통. 무심코 매일 보는 그 풍경에서 무언가 보이기 시작한 날이 있었다. 늘 그 자리를 지키는 안 먹는 반찬들과 달리 어느 순간마다 부쩍 줄어있는 물병. 조금씩 조금씩 내려가는 물 높이를 보면서 안도감을 느낀 건 어째서 일까. 가벼워지는 페트병을 들면서 나도 가벼워지는 거 같았다. 냉장고 구석에 놓인 딸기잼처럼 줄지도 않고, 계속 같은 곳에 서있는 기분이었으니까.


이만큼 마셨구나 

이만큼 지났구나 

이만큼 살았구나 그리고 곧 빈병이 보이겠구나 


어쩌면 나는 가시적으로 확인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변하고 있다는 것을,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리차가 담긴 이 병을 보면서. 

눈은 마음이 보고 싶은 곳을 본다.


영화 <다빈치 코드>에 나오는 말처럼 나는 참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끝이 있는 모습. 

드러난 바닥을 보면서 이게 끝이라고 실감시켜 주고 싶었고, 

또다시 채울 마음을 개운하게 부어주고 싶었다.





'인생은 생각보다 길어서 살아볼 만하다'고 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아서 우리를 지치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곧잘 말아톤에 비유된다. 끝까지 달려봐야 승패를 알 수 있다고, 언제 출발해도 늦지 않는다고. 그러니 인내심을 가지고 뛰어 보라고. 그래서 격려를 얻고 곳곳에 새로운 스타트라인을 그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 덕에 자주 나동그라지는 일을 겪기도 했었다. 깨지고 부딪치면 차라리 좋으련만, 뛰긴 뛰는데 제자리걸음. 정체기에 들어서면 정말 답이 없다.


"거의 다 왔어, 이제 거의 다 왔어" 기차를 타고 먼 곳에 사는 친척네에 갈 때면 어른들은 항상 그러셨다. 가도 가도 논만 보이니까, 똑같이 생긴 산만 보이니까 어린 나는 자꾸만 물었던 거 같다. 언제 도착하냐고. 한 시간이 지나도, 두 시간이 지나도 신기하게 돌아오는 대답은 변함이 없었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거의 다 왔다'는 것으로. 지루하고 따분한 과정을 견디게 하는 건 '끝이 있다는 믿음'이니까.


보이지 않는 것도 그릴 수 있는 어린 왕자가 아니라서 우린 때로 믿는 것에 힘들어한다. 보이지 않아도 있다고 믿을 수 있는 게 사람의 믿음이지만, 보이는 것도 없다고 믿게 만드는 것 또한 우리들 믿음이라서 나는 엉뚱스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자주 보이면 나는 믿지 않을까. 길고 긴 레이스 군데군데 피니쉬 라인이 있다면 나는 끝이 있다고, 끝에 갈 수 있다고 믿지 않을까.  


그리고 이런 생각도 들었다. 모두 마라토너가 될 필요는 없을 거 같다고. 달리기에도 여러 종목이 있듯 나에게 맞는 방식이 있을 테니까, 단거리 선수로 수많은 레이스를 이어가는 게 내 인생이라고. 내입에 맞는 보리차처럼 말이다. 


10대를 꼬박 털어 넣는 수능, 처음 겪는 사상 최대 말아톤으로 스무 살 초입에서 나는 결과에 상당히 힘들어했다. 학기마다 과목이 달라지고 점수가 매겨지는 대학생활이 나한테는 딱 잘 맞았다. 하지만 사회생활에선 '맞고 안 맞고' 보다 '버티고 못 버티고'가 중요한 덕목인 것도 깨닫는 요즘이라서, 버티게 하는 부표마저 흔들리고 있어서, 한동안 꽤 오래 표류하는 심정에 몰렸다.


다 식은 보리차를 담으면서 '이 물을 다 마실 때까지만 살자'고 주문해본다. 야금야금 두통을 비울 때까지만 힘을 내보자고. 눈이 쫓는 곳으로 몸도 가기 마련이니까, 끝을 따라서 자꾸자꾸 새로운 시작에 서보자고. 새로운 시간이라면 새로운 마음을 담아야 한다. 열심히 먹고 꽉꽉 채워본다. '장거리에 최적화되지 못한 내가 사는 방법은 이래!' 지르고 나서 또 한 모금.

매거진의 이전글 동상이몽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