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im possible Jan 18. 2016

그릇 속 그녀의 세상

엄마의 세상을 이제  들여다본다

엄마와 나 사이, 부익부 빈익빈은 주방에서 벌어진다. 머그컵 2개, 밥그릇 2개, 플라스틱 반찬통 4개. 채 열 개가 되지 않는 나의 자취방 그릇 컬렉션이다. 이마저도 그녀의 주방에서 흘러나왔기 때문에 애초에 수적 차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얼마 전 집에 내려 갔을 때엔 주객이 전도된 그릇 공화국에 온 거 같았다. 그릇의 일반적인 홈그라운드인 주방 서랍장부터 거실의 장식장과 베란다 양쪽 선반, 작은 방 한쪽 벽면을 메운 5단 책장까지. 옷장을 제외한 들어갈 수 있는 모든 곳에 그것들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밥, 국, 찌개, 김치를 비롯 음식 종류별로 달라지는 모양새와 크기는 유리, 사기, 플라스틱, 스테인리스 등의 다양한 재질과 매치를 이뤄 무궁무진한 그릇의 향연을 펼쳤다. 


내가 중학생이 된 이후로 우리 집은 갈수록 좁아졌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릇은 점점 많아졌다. 첫째 딸도 시집간지 3년이 넘어가는 이 마당에 왜 그릇은 줄지 않고 늘어만 가는 것인지 나는 궁금해졌다. 이십 대 후반 작은 딸은 이제야 그것들이 신경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고도古都를 사랑한다>에서 강석경 작가는 그릇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비어있기 때문이라고.

무엇이든 담을 용의를 지니고 겸손하게 비어 있는 모양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다

겸손한 게 미덕인 그릇 같은 성품을 지닌 사람. 엄마가 꼭 그 짝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너무 존중하고 자신은 너무 낮추는 통에 '미덕'보다는 '미달'로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다. 언제나 부족한 사람이란 그녀의 태도는 학창시절 이름 모를 선생님들에게 나의 모든 교육권을 넘겨주기도 했다. 나는 칭찬도 꾸짖음도 그녀에게서 듣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말은 "모르면 누구한테나 물어봐야 해"였다. 생각해보면 아무런 대답이라도 괜찮았다. 그냥 엄마가 생각하는 답이란 걸 당당하게 말해주었으면 했던 것이다. 늘 채우지 못해서 안달이 난 그녀가 떠올라서 그릇은 내게 좋게 다가올 리가 없었다.


대체 그 많은 그릇을 언제 쓸 거냐고 물으면 "나중에 다 필요해, 두면 다 쓸데가 있어"라고 답하는 그녀였다.

전쟁통도 아닌데 최소한 엄마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휴전선이 허물어질 일은 없을 텐데 그릇으로 무얼 대비할 셈인 건지. 오래되고 낡은 식기와 수저까지 끌어안고 사는 게 참 싫었다. 엄마가 아프고 나서는 내가 그 그릇들과 남게 될까 봐 그 빈 그릇들 속에 파묻혀 버릴까 봐 겁이 나서 더 그랬다.




세상(世上)이란 천지(天地)와 견줄 만큼 사람이 살고 있고 갈 수 있는 지구 모든 곳이 된다. 하지만 그 앞에 '한 사람'이란 명사와 조사 '의'가 붙으면 그 크기가 콩알만 하게 팍 줄어든다. '한 사람의 세상'은 한 사람이 보고 듣고 만지는 곳. 즉 움직이는 행동반경이 전부란 소리다.


그 매정한 정의 덕분에 나의 엄마에겐 주방이 세상이었다.

'먹이는 일'이 대부분 어머니들의 타고난 임무가 돼버린 지 오래지만 '입히는 일'에선 다른 선택지가 생긴다고 생각했다. 헌데 엄마는 또 주방을 택한 것이다. 출장뷔페, 감자탕, 국밥, 곱창. 내가 초등학생일 때부터 성인이 된 이후에도 수많은 요리를 그릇에 담고, 비워진 그릇을 씻으셨다. 아마 내가 모르는 메뉴도 더 있을 것이다. 

기껏해야 조그만 목을 얻어 음식집을 열었던 게 외도라면 외도였다.


한식자격증도 있을 만큼 그녀는 요리를 잘했으며, 음식을 한 번해도 양껏 만들어서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겼다. 그녀가 잘하는 것을 벌이로 삼았으니, 음식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줄 수 있었으니 조금은 덜 고단했으리라 믿고 싶다. 그래도 나는 엄마의 세상을 조각케익 자르듯 자른 사람이라서 그녀가 좋아하고 즐기는 취미가 요리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지금이라도 엄마가 보는 세상을 넓혀주고 싶다. 그림을 배우거나 가벼운 댄스를 춰보는 것. 손재주가 있으니 작은 공예품을 만들어 보는 것도 재미있어 하실 거 같다. 워낙 배우려는 자세가 좋은 사람이라서 금방 배울 것이다. 밥 짓는 냄새와 국 끓이는 소리도 안나는, 주방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하이든의 종달새처럼 발랄하게 날아가는 엄마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따뜻한 오키나와 온천에 몸도 담그고, 열기구를 타고 뉴질랜드의 하늘에도 데려가야 겠다고 약속도 해본다.


고생의 흔적이 묻은 그릇은 제발 버렸으면 했지만 역시 내 생각은 아직 많이 짧다는 것을 깨닫는다.


엄마의 눈물, 엄마의 행복, 엄마의 기분, 엄마의 꿈, 엄마의 돈.

엄마의 모든 것들을 담았을 테다. 그릇이란 녀석들은. 어쩌면 도리어 고마워해야 할 녀석들이다.

그녀가 쏟아내는 것들을 말없이 다 받아 주었을 테니까.


그녀가 열심히 살아온 증명이 되는 것들을 없앤다면 그 역시 얼마 되지도 않는 엄마의 세상 평수를 줄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안 되겠다. 엄마가 해주는 반찬 꼭꼭 담아서 깨질 때까지 안고 가야겠다. 하지만 더 이상은 늘어나지 않아줬으면. 그래도 "그릇 조금만 줄이는 게 어때"라고 묻는 딸에게 그녀는 너보고 가져가라 안 할 테니 걱정 말라하신다.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의 가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