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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possible Mar 01. 2016

후배의 짝사랑

산책하듯, 니가 부러워

후배의 얼굴은 좋아 보였다. 전화로는 앓는 소리만 하더니 석류마냥 혈색만 빛났다. 좀 더 공부해보겠다고 대학원에 진학한 후배는 어려운 용어와 깊어진 개념들로 가득 찬 이론서적들에 늘 울상 이모티콘만 보내왔었다. 내 주변엔 대학교를 졸업하고 또 펜을 든 이가 흔치 않기에, 워낙 공부 욕심도 있는 녀석이라서, 온국민이 취업을 열창하는 틈바구니 한가운데 놓인 칠포 세대인 그녀가 나는 더 기특했다. 한 살 차이도 후배는 후배니까. 든든한 밥 한 끼 정도는 '이쯤이야' 사주고 싶었다.


밥을 먹으며 나는 오랜만에 집에 온 자식에게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질문세례를 퍼붓는 엄마처럼 꼬치꼬치 후배의 근황을 캐물었다. 공부는 잘 되고? 밥은 맛있어? 집에서 학교는 안 멀고? 교수님은 어떠셔? 사람들하고는 잘 지내? "이 언니 진짜!"  대답도 듣지 않고 다다다다 쏘아대는 내가 우스워서, 말을 하란 건지 말란 건지 후배도 웃겨서. 우리는 동시에 깔깔거리며 웃었다. 


"힘든데, 재미있어요. 또 다른 의미로도 그래요." 말을 이어가는 후배의 부드러운 미소, 그 배후에는 누군가 있었다. 첫 수업에 들어간 날, 맨 앞줄에서 널찍한 등을 자랑하고 있던 사람은 전공 수업 때마다 교수님을 보좌했으니, 가끔씩 프린트를 나눠주고 공지사항을 전하는 조교였다. 후배가 좋아하는 키 크고 건장한  체격인 데다가 교수님이 모르는 질문을 해도 시원하게 '잘 모르겠습니다.'를 외치는 대범한 모습에 점점 눈길이 갔단다. 그래서 끝에 앉던 후배는 점차 앞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고, 짧은 인사라도 나누고 싶어서 전공과목이 있는 날이면 부리나케 강의실로 향한다고 했다.


그러길 넉 달 째라는 그녀에게 그래서, 그래서를 반복하니, 눈을 동그랗게 뜨며 돌아온 건 "그래서라니요?!"

나도 눈에 힘을 주며 "그게 다란 말이야!?"로 받았다. "그게 다죠." "그게 뭐야." "그게 왜요." 차라도 한잔 같이 마시려면 연락처라도 물었어야지, 네 달 동안 인사만 열심히 하면 그 사람이 어느 세월에 너를 좋아하겠어, 너만 실실거리고 바라보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따져 묻자 "좋으니까요."랜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만나는 사람이 있는지,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지만 검은색보다 남색 볼펜으로 필기를 하고, 모자가 달린 후드티를 즐겨 입으며, 에너지 드링크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 그것만으로 후배는 덜 퍽퍽해진 생활이 마음에 든다고. 이렇게 관찰하고 지켜보다 보면 가까워져 있지 않겠냐고. 지금의 그 사람도 자신도 멀찍이 떨어진 거리도 좋아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했다. 초강력 해탈제를 먹기라도 한 건가.


나는 자꾸 '그래서'가 튀어나왔다. 좋아한다. 그래서 고백한다. 좋아한다. 그래서 선물한다. 좋아한다는 말은 늘 뒷 문장을 세트로 데리고 다닌다. 좋아하는 감정은 어떤 행동을 야기시키기 마련이니까. 줄줄이 소시지처럼 하고 싶은 것들이 마구 생겨나니까. '좋아한다'는 접속사 '그래서'로 자신과 특정한 행동을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원인과 결과, 그 사이에서 그래서는 어울리는 문장들을 만들고 문단을 꾸린다. 그런데 후배는 좋아한다가 끝. 억지로 끼워 넣은 나의 그래서는 호응을 이루지 못했다. '좋아한다. 그래서 좋아한다.'라니. 누가 봐도 엉터리인 두 문장.


후배의 싱거운 사랑 얘기는 달짝지근한 믹스커피를 마실 때마다 옅어져 갔다. 저녁을 먹고 커피까지 마신 뒤 소화도 시킬 겸 근처 공원으로 향한 어느 날이었다. 휴대폰에 저장된 800여 곡을 랜덤으로 재생시키고, 나는 걷기 시작했다. 일일이 듣고 싶은 곡을 찾아 듣다가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마르고 닳도록 꺼내야 하니까. 마음에 드는 노래가 있을 때마다 한 곡씩 다운받았으니, 어떤 노래가 흘러나와도 내 귀는 수긍할 수 있었다. 서너 곡이 지나갔을까. 귀에 꽂히는 노랫말이 있었다.


아침이 정말 좋아. 그댈 볼 수 있어 좋아.

누가 뭐라 해도 난 뒤따라 걸어간다.


수업 듣는 날이 좋다고 그랬는데, 얼굴 볼 수 있다고. 내가 그렇게 그래서를 외쳐도 바라보는 것만도 좋은데, 좋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그랬는데. 나는 다시 처음부터 노래를 재생시켰다.


몇 걸음 뒤에서. 조금이라도 급하게 서두르면 안 돼.

새하얀 어깨 위로 내려앉은 햇살이

뒤를 돌아보며 웃을 때까지.


어떻게 해서든 빨리 존재감을 어필해야 한다는 내 주장과는 달리 후배는 느긋했다. 햇살마저 웃어주는 최적의 그날까지 천천히 기다리겠다는 가사처럼, 짝사랑을 즐기는 자의 위용을 보였다.


이젠 말을 걸어볼까. 설레는 마음으로 한 걸음. 두 걸음. 

그대 앞으로 걷는다. 어떤 말로 시작할까.

그리고 그다음엔. 그리고 그다음엔.


인사를 하고 오늘의 일상과 옷차림, 날씨 같은 기본적인 안부를 묻기까지. 그녀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신중을 기울이며 어휘를 고르고, 그의 기분을 살폈겠지. 그가 다음 말을 받을 수 있도록. 짧지만 어색하지 않은 유쾌한 대화였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그렇게 다음번 후배와의 대화를 반갑게 기대할 수 있도록. 아무것도 안 한다고 뭐라 했지만 후배는 나름대로 할 수 있는 걸 최선으로 했겠구나. 설레는 마음으로 한마디. 두 마디.



경쾌하고 밝은 멜로디라 금방 입에 붙은 노래. 여러 번 흥얼거리는데 이상하다. 

산책길에서 사랑을 노래하는 이 노래. 그런데 사랑한단 말도 좋아한단 말도 나오지 않는 노래. 그대를 좋아하기보다 그대를 볼 수 있는 아침이 좋다고 말하는 노래. 이 노래, 참 후배 같다.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말해야 한다'고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닌데 나한텐 무조건 반사 같은 거였다. 맛있는 걸 보면 침이 고이고, 잔인한 걸 보면 감기는 눈처럼. 좋아하면 좋아하는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 너무도 당연했다. 그래야 만날 수도 있고, 헤어질 수도 있으니까. 시작도 하기 전에 혼자 속앓이를 하는 건 시간만 축내는 미련한 일이니까. 사랑에 빠지는 결승선을 나만 통과하는 건 열심히 달린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라서, 두 사람이 함께 넘지 못한다면 최대한 빨리 적은 노력으로 멈추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난 짝사랑을 해본 적이 없으니까.


혼자서 미련한 달리기를 하는 듯 했던 후배는 이제 보니 산책 중인지도 모르겠다. 목적지 없이 편하게 이쪽저쪽 다녀보고, 그러다 마음에 드는 길이 생기면 자주 가고, 걷다가 지치면 잠시 쉬기도 하면서. 얼마 동안 걸어야 하는지 몰라도 되는, 누가 쫓아올까 조마조마하지 않아도 되는, 모든 에너지를 쏟아 넣지 않아도 되는, 잘했다 못했다 평가받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산책. 그런 사랑. 푸른 잔디밭을 살금살금 즐겁게 걷고 있는 후배가 이제 보인다. 비가 오지 않아 걷기 좋은 땅, 온화한 바람만으로 충분히 두근거려하고 있는. 


사랑도 꿈도 일도 남들보다 빨리 성취해야 기분 좋은 세상. '꼭 이기고 말겠어, 보여주고 말 거야.' 비장한 각오가 길에 넘친다. 보여주지 못하고 제풀에 꺾인 이들도 넘친다. 혼자 해도 느려도 기분 좋은 산책길. 후배는 내거로 만들겠다는 야망도 적극적인 태도도 안 보인다. 하지만 그래서 누구보다 오래 걸을 수 있다. 시나브로 시나브로 걷다가 원하는 곳에 가있을 것만 같다.


천천히 걷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후배가 부러워졌다. 가벼워 보여도 별것 아닌 거 같아도 그 산책은 운동이 될 테니까. 어쩌면 건강한 사랑을 하고 있으니까. 꿈과 연애 모두 포기하지 않고 있으니까. 나도 조금은 산책이 하고 싶어 졌다. 달리지 못해서 하는 산책이 아니라, 걷는 게 좋아서 하는 산책. 아침이 정말 좋은 산책.



> 산책 _이지형 2집 Spectrum 中_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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